[오후 한 詩]당나귀에서 귀를 빼면 뭐가 남나/성선경
대구뽈떼기찜집에 갔는데
찜만 나오고 김치가 없었다
김치가 아예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소주를 한 병만 먹기로 하고 두 병을 먹었다
소주를 두 병이나 먹게 했다
대구뽈떼기찜을 먹으며 나는
기다림이 기다림으로만 끝나는 이번 겨울엔
꼭 청령포를 한 번 다녀오리라 생각했다
남들은 다 불그스름한 단풍이 오는데
어째 내게 오는 소식은 잠잠하다
잠잠, 잠잠한 것
그러나 나는 간혹 잠잠한 게 좋았다
AD
궁핍한 자는 오래 슬프리라 생각했다
오래된 묵은지의 시큼함이 목까지 차오른다
■이 시는 제목만 봐서는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을 성싶고 앞부분은 그런 기대를 허물어뜨리지 않는데, 다 읽고 나면 울컥해진다.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되어 살았던 곳이다. 앞으로는 서강이 흐르고 뒤로는 육류봉이 버티고 있는 그곳은 폐위된 어린 왕의 말 그대로 육지고도(陸地孤島)다. 지금 시인이 앉아 있는 '대구뽈떼기찜집' 한 귀퉁이가 그런 곳인 셈이다. 그 까닭은 '대구뽈떼기찜'에 김치가 나오지 않아서이거나, "한 병만 먹기로" 한 소주를 두 병이나 먹어서가 결코 아니다. "남들은 다 불그스름한 단풍이 오는데" "어째 내게 오는 소식은" 그저 "잠잠"하기만 해서다. 또한 "그러나 나는 간혹 잠잠한 게 좋았다"라고 아무리 달래 봐도 결국은 "목까지 차오"르는 "시큼함" 때문이다. "궁핍한 자는 오래 슬프리라". 오늘은 내 서러운 궁핍이 문득 섬처럼 잠연해질 때까지 오래도록 소주를 마실 것이다. 채상우 시인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