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긴 복도를 걸었어요
거미줄을 헤치며
저녁이 오고
기억나지 않는,
어느 복도에 대하여
목소리의 끓는점에 대하여
막다른 곳에서
어른이 되었다가
메아리가 되었다가
아무도 마주치지 않은 채
내가 복도를 가득 채웠어요
천천히 닫히는
폭설처럼
복도가 나를 묻어 버리고
복도는 멀리 떠내려가요
그곳에 오래 살았어요
■ 살다 보면 괜스레 쓸쓸한 날이 있다. 쓸쓸해서 책상 위 서류들도 쓸쓸해 보이고, 시곗바늘도 쓸쓸하게 저 혼자 흘러가는 듯하고, 직장 동료의 농담도 그저 부질없게만 들리는 그런 날. 그런 날 친구 하나 불러내 술 한잔 마시고 있자면 친구야 떠들건 말건 쓸쓸함은 걷잡을 수가 없어져 급기야는 돼지 껍데기마저 나를 외면하고 피식 돌아눕는 듯해 순간 울컥해지고. 이래도 무작정 쓸쓸하고 저래도 도무지 쓸쓸한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왜 또 그렇게 멀고 어두운지. 간신히 버티고 버텨 집 앞까지 오고 나면 집에는 들어가기가 싫고 아니 감히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그런데 그럴 때 하루 종일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쓸쓸하다'는 말을 문득 입 밖으로 내뱉고 좀 있다 보면 그 깔끄러운 다정함에 참 희한하게도 쓸쓸함이 가시지 않던가. 쓸쓸함은 쓸쓸함으로 견디는 거다. 그리고 쓸쓸함으로 떠나보내는 거다. 그렇게 사는 거다.
채상우 시인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