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컨대 우리 부부는 같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같은 선생이 우리 둘을 세상에 받아냈다. 그 선생은 친정엄마가 두 번 유산한 끝에 간신히 나를 가졌을 때, 망사로 된 빈 장바구니조차 들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내 뒤로 엄마는 아들 둘을 더 낳았다. 선생은 몹시 부러워하며 아빠는 엄마에게 다이아를 해줘야 한다고 말했단다. 우리 엄마는 그런 얘기들을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내 남편을 갖고 낳았을 때, 그 선생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같은 직업을 가진 댁이라 더 조심했을는지도, 그래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을지도. 2년이나 연애를 하고 십삼 년이나 함께 사는 우리 부부에겐 공통점이 하도 없어서, 한때는 그런 게 바로 팔다리에 묶인 붉은 실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 남자와 함께 사는 동안 무던히도 싸웠다. 연애할 때처럼 당사자들끼리의 문제였다면 좀 나았으련만, 한국적인 맥락에서 결혼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양가의 부모들과 우리가 낳은 새끼들까지 끼어들며, 삼대 세 가정의 문제가 됐다. 제주 내려와 좀 덜하나 싶더니,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하고 오 년 만에 집을 지으면서 도루묵이다. 부부가 전생에 서로 빚이 많았던 모양, 우리의 월하노인은 꽤 악취미인 모양. 어쩌면 이다지도 닮지 않은 부부를 묶어, 한 때는 서로에게 미치게 만들고, 그 대가로 평생을 서로 미쳐가게 만들까.
집을 지으며 들여다보니 설계대로 지어지는 집은 없었다. 공사는 예정보다 석 달이나 늦춰졌다. 이 집 저 집 떠돌다 새 집에서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에는, 정작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결혼도 어느새 이 집처럼 돼 버렸다. 한때는 분명 원했던 집인데, 처음과는 다른,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집. 그러고 보니 붉은 실은 애초에 랜덤이었고, 그나마도 자주 엉키는 모양이다. 어쩌면 결혼의 설계자인 월하노인은 죄가 없다. 시공하는 우리 손발이 거칠고 투박한 걸지도. 페이스북에 이런 푸념을 늘어놓으니 누군가 댓글을 달았다. “액세서리 사업할 때 목걸이가 자주 엉키곤 했어요. 도금은 조금 풀다 버리기 일쑤였지만, 금과 은은 몇 시간이 걸려도 풀고야 말았지요. 붉은 실도 엉키는 게 문제라기보다, 풀어낼 만큼 가치가 있는지가 문제일 테죠.” 그래서, 25주년, 50주년, 꼼짝 않고 붉은 실을 풀어낸 사람들에게 은혼식, 금혼식이라는 게 있는 모양. 도깨비의 불멸처럼 그게 상인지 벌인지는, 오직 당사자들만 알 터다. 모처럼 드라마 보며 상념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