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정치학에서는 그동안 민주주의 쇠퇴를 우려해왔다. 시민이 개인으로 파편화되고, 정치의 고객으로 전락했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6년 한국은 이제껏 보지 못한 민주주의 단계에 진입했다. 시민들은 정치의 수단에서 탈피해 집단지성을 갖추고 스스로가 정치를 도구로 활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까지 정국을 보면 정치권으로 대표되는 여의도는 머뭇거리고 자중지란에 빠졌지만, 광화문 촛불로 상징되는 시민들이 정치권을 이끌어 나갔다. 언론 보도로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의 명백한 증거를 확인한 뒤 시민들은 광화문을 무대 삼아 직접적인 의사 표현에 나섰다. 여론의 무서움은 10월28일 갤럽의 주간 여론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불과 한 주 사이에 지지율이 8%포인트 떨어져 절대 무너지지 않아 콘크리트라고 불렸던 박 대통령의 지지율(30%대) 신화가 깨졌다.
박 대통령은 11월8일 전격적으로 국회를 방문해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여야 추천 총리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거국중립내각을 주장했던 야권은, 설마 받아들일까 했던 정국수습책을 대통령이 받아들이자 당황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 지지층은 결집하지 않았고, 그 주 주말 광장에는 100만명의 시민이 모였다. 이때 비로소 제도정치권은 광장에 깃발을 들고 참여했다.
혼란은 계속됐다. 11월14일 박 대통령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회담의 영수회담 제안과 취소 논란을 겪으면서 야권의 분열이 깊어졌다. 박 대통령은 차관급 인사를 단행한 데 이어 엘시티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의 수사를 지시했다. 당시 박 대통령의 국무회의 복귀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야권 수뇌부에서는 박 대통령이 자신을 수사하던 검찰을 상대로 수사지시를 내리는 것을 보며 사태 장기화가 불가피하다면서 '공포감'에 빠졌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촛불이 꺼질 것'이라는 비아냥을 무색하게 시민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치권은 모두 현재 시민들의 요구가 박 대통령의 즉각 퇴진으로 직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광장의 요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라며 "이제 정치권은 경제 사회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비전과 실력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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