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나라는 정부, 기업 모두 연구개발에 많은 투자를 해왔다. 특히 기초연구에 대한 투자는 이제 선진국 수준에 이르고 있다. OECD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총연구개발 투자의 약 17.6%가 기초연구에 투자되고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비율이다. 하지만 통계의 세부내용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미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에 비해 우리나라의 기업이 수행하는 기초연구의 비중은 높은 반면 대학의 기초연구 비중은 낮다는 점이다. 선진국들의 기초연구투자가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기초연구는 기업을 중심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선진국들이 기초연구를 근원적(fundamental) 연구 활동으로 인식하고 대학을 중심으로 연구 활동이 수행되고 있는 것에 비해 우리나라에서의 기초연구는 연구개발 프로세스상의 기초-응용-개발단계에서 기초단계에 해당하는 연구 활동으로 수행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새로운 획기적인 발견과 원리 규명보다는 새로운 제품 개발과 개선을 위한 초기단계의 연구를 기초연구로 인식하고 활동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가 추격형 전략을 연구개발의 핵심 전략으로 추진해 온 것과 같이 기초연구도 여전히 추격형 전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초연구 관련 통계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글로벌 수준에서 우리나라의 연구논문의 양적 순위와 질적 순위를 비교할 때 그 차가 확연하다는 점이다. 현재 연구 논문의 양적 수준은 12위권이다. 그러나 질적인 수준은 30위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동안 정부는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양적 투자목표까지 설정해서 정책적 우선순위를 높이 두고 추진해왔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양적인 성과만 높였을 뿐 질적인 성과는 지난 10년간 전혀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혹자는 양적 임계규모에 이르러야 질적 개선이 이루어지는 법이라고 하지만 한편에서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지금과 같은 양적 규모라면 노벨상을 이미 열 개는 받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기초연구에 대한 투자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창의적 도전을 통한 영향력 있는 연구 성과들은 창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초연구활동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을 통해 기존 지식과 이론의 오류를 발견하고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면서 발전해 간다. 도전적인 연구란 전혀 새로운 질문을 찾아내거나 이미 알려진 중요한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연구자가 문제를 찾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거나 연구자에게 도전적인 연구 활동 수행보다 연구과제 수주가 더 중요해지고, 나아가 어려운 난제에 도전을 했음에도 평가 과정에서 이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면 근원적 기초연구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선진국들은 근원적 기초연구를 넘어 기초연구를 통한 문제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인류와 국가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원천으로서 기초연구의 역할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기초연구는 더 이상 연구자가 하고 싶은 연구, 호기심 차원의 연구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것은 노벨상 선정 과정에서 연구 성과가 얼마나 인류의 삶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쳤는가를 중요하게 평가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노벨상은 과학연구 활동이 인류의 삶과 복지, 경제사회적 문제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논문 그 자체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인류와 국가를 위한 과학 활동 본연의 역할을 살려낼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이민형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