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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측량/안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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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인을 알 수 없는 상자가 배달되었다

상자를 열어 보려고 하자 그는 만류했다 열어 본다는 것은 책임지겠다는 뜻이라고
우리는 상자를 앞에 두고 잠시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때 상자가 움직였다 생명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했다 누군가에게 영원히 되돌아갈 집이 된다는 것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자라나는 이파리들을 날마다 햇빛 쪽으로 끌어다 놓는 스스로를 상상했다 기대하고 실망하는 모든 일들이 저 작은 상자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각은 영혼을 갉아먹는 벌레 같았다 작고 하얀 벌레는 순식간에 불어나 온 마음을 점령했다 상자가 움직일 때마다 우리의 하루도 조금씩 휘청거렸고

고작 상자일 뿐이었다면 쉽게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잘못 배달되지 않은 사랑이 과연 있을까
더구나 생명이라면

너는 상자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싶었다

[오후 한詩]측량/안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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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상자 하나가 배달된다. 그런데 그 상자에는 받을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물론 보낸 사람의 이름도 없다. 그런 상자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은 "잠시 생각을 하기로" 한다. "그때 상자가 움직였다". 정말이지 저 안에 어떤 작은 생명체라도 들어 있다면 심각한 일이다. 책임을 져야 하니까, 저녁이면 "영원히 되돌아갈" 수 있는 집이 되어 주어야 하니까. 그리고 연이어 생각에 생각이 더해져 이런 생각들까지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노란 우비를 사 줘야지, 그래도 중학교 때부터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텐데, 갑자기 시를 쓰겠다고 그러면 어떻게 달래나, 대학은 좋은 델 가야 할 텐데, 아니 아니 그보다 내가 저 아일 잘 키울 수 있을까... "그런데 말이야, 잘못 배달되지 않은 사랑이 과연 있을까"? 그래서 사랑은 어려운 거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자식은 손님 같다고. 그것도 날이 가면 갈수록 데면데면해지는 손님 말이다.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그 순간 물은 누구도 마실 수 없는 흙탕물이 되어 버린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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