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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불타는 비탈/이선균

최종수정 2016.10.14 20:38 기사입력 2016.10.1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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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모와 고추를 딴다. 노모의 허리와 무릎이 익힌 통증을 딴다. 가슴 깊숙이 욱여넣은 통점을 열면 문득 서늘해지는데

 고추씨로 허기 면하던 까치들, 거덜 나는 고추밭 내려다보며 칵칵 퍼덕퍼덕 으름장 놓는다. 잘 익은 고추씨가 일용할 양식이란 걸 저들은 어떻게 알아냈을까. 얼얼한 통증의 맛을 어떻게 즐기기 시작했을까. 비릿한 씨앗이 다글다글 뜸들 때까지 무엇으로 견뎠을까. 생각의 꼬리가 날개를 타는데

 빨갛게 가꿔 놓은 일 년 농사를 까치 무리들이 짓이겨 놓는다고, 저 새들이 화적 떼가 되어 간다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라고 노모의 한숨에 산자락도 허리 굽는데

 저녁 하늘이 불타고 있다.

 접시꽃 이팝꽃 샐비어……
 툭, 툭, 툭 벌어지는 그 순간
 노모가 소리치신다.
 밥부터 먹자, 저 꽃들도 허기지겠다!

 
[오후 한詩] 불타는 비탈/이선균

 여름이 저물고 가을이 맺히는 어느 저녁 무렵이었나 보다. 한낮을 지나 그때까지 시인은 다 늙은 어머니와 고추를 땄나 보다. 노모는 아마도 한생을 기울여 고추를 심고 가꾸고 거두고 다시 심고 그랬겠지.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고 십 년이 오십 년이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가고 가고 그랬을 테지. 그동안 노모는 온몸에 새겨진 깊은 주름들만큼이나 참 많은 일들을 겪었을 것이고. 어떤 날은 기뻤고 어떤 날은 슬펐고 또 어떤 날은 폭폭했고 그렇게 말이다. 그에 비하면 저어기 저 산 너머에서 반가운 손님이 곧 올 거라고 아침부터 살뜰하게 울어 대던 까치가 지금은 "화적 떼가 되어" 가는 것쯤이야 어쩌면 대수롭지도 않은 일. 그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一切無常). 둘러보면 온 세상천지가 화택이지 않은가(三界火宅). 그 안에서도 꽃은 피고 지는 게 이치고 또한 그래야 그 씨앗은 세상을 향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니 잔말하지 말고 두말하지 말고 일단 "밥부터 먹자, 저 꽃들도 허기지겠다!" 이 한 말씀 이루기 위해 참 갸륵한 생이셨겠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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