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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을 꾹꾹 눌러 베껴쓰며 밤 새본 적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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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윤의 '문장의 추억' - 아날로그시대 문학 최후의 취미, 필사(筆寫)

(이미지 =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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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그 집과 그 사람들만은 피해서 지나갔던 모양이다. 주인들은 나를 옛날의 나로 대해주었고, 그러자 나는 옛날의 내가 되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필사 소설 중 가장 인기가 높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필사 소설 중 가장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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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지망하는, 혹은 지망했던 사람이라면 손끝이 저릿하고 손목이 아린 와중에도 써 내렸을 익숙한 문장,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 중 한 구절이다. 눈으로 읽어 가슴으로 닿는 명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나도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을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은 필사를 통해 합법적(?)으로 그 문장을 훔치고 베꼈다. 지난해 문단을 뜨겁게 달군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을 놓고 유시민 전 장관은 한 강연에서 신경숙 작가처럼 글쓰기 실력 향상을 위해 필사를 많이 한 사람의 경우엔 종내에는 내 문장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키보드로, 스마트폰으로 우리가 하루에 쓰고, 또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의 양은 엄청나지만, 손으로 온전한 문장을 쓸 기회는 좀처럼 없는 현실에서 새삼 문학작품 ‘필사’가 주목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 = Miniature of Vincent of Beauvais writing in a manuscript of the Speculum Historiale in French, Bruges, 1478~1480, British Library (영국 브리티시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필경사와 스트립토리움(사본실)를 담은 삽화), 위키피디아 제공

사진 = Miniature of Vincent of Beauvais writing in a manuscript of the Speculum Historiale in French, Bruges, 1478~1480, British Library (영국 브리티시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필경사와 스트립토리움(사본실)를 담은 삽화), 위키피디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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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향한 욕망
인쇄기술이 발명되기 이전, 인류가 지식을 후대에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구전과 필사 뿐이었다. 구전이 기억과 해석을 거쳐 전해오는 과정에 왜곡이 생기는 점을 생각해볼 때 온전한 지식 전달은 필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중세 이전, 유럽에서 필사는 하나의 문화였다. 필사를 통해 이어져 온 저작물은 고전 또는 경전이었고, 수도원은 책 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수도사와 서기관은 수도원의 사본실에서 성경을 필사하는 것이 의무이자 직무였고, 보다 전문적인 필사를 담당했던 필경사 한 사람이 일주일 동안 작업해도 글씨가 빽빽한 책의 한두 쪽을 필사하는 게 전부였다. 1,272쪽짜리 성경 주석서 한 권을 제작하는데 필경사 두 명이 매달려 작업했음에도 1453년부터 1458년까지 5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가장 책을 많이 보유한 수도원조차 그 수가 20권 내외에 그쳤으니 일반인이 평생에 걸쳐 책을 1권도 갖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지식은 전파되지 않고 고여 그것을 가진 한정적인 사람의 권력으로 작동했다. 1495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납 활자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류의 문화혁명은 한참 뒤로 미뤄졌을지 모를 일이다.

사진 = KBS 'TV 책을 보다' 화면 캡쳐

사진 = KBS 'TV 책을 보다'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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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必死)적 필사(筆寫)

서구에 ‘중국을 들여다보는 창’으로 통하는 작가 위화는 저서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자신의 유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매달렸던 필사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당시 독초 소설로 분류된 알렉상드르 뒤마의 ‘춘희’ 축약 필사본을 어렵게 구한 그는 하루 만에 책을 친구에게 돌려줘야 했는데, 이 소설이 너무도 갖고 싶었던 나머지 함께 읽던 친구와 독서를 중단하고 그때부터 밤새워 책을 베끼기 시작한다. 친구와 몰려오는 잠을 쫓아가며 번갈아 책을 필사하기 시작한 위화는 마침내 다 베낀 책을 들고 다음 날 학교도 결석해가며 집에 틀어박혀 독서에 몰두한다. 문제는 급하게 베낀 나머지 친구가 필사한 부분의 글씨를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던 것. 화가 난 그는 친구에게 쫓아가 알아볼 수 없는 글자를 물어가며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때의 필사 경험을 두고 “마치 입으로 음식을 떠먹는 것 같은 독서”라고 고백한다. 필사적인 필사가 아닐 수 없다.
사진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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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글씨, 두뇌발달에 어떤 영향?

미국 플로리다 국제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손으로 글씨를 쓰는 학생은 키보드로 문서 작성하는 학생보다 읽는 법을 배우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정보를 더 오래 유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컴퓨터를 이용하는 학생의 뇌는 극히 일부분만 반응하지만, 손으로 필사하는 학생은 뇌 전체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밝혀진 것. 또한, 미국 프린스턴 대학 팸 뮬러 교수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대니얼 오펜하이머 교수는 ‘펜이 키보드보다 강하다’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강의를 듣고 손으로 필기한 학생들이 말하기 속도에 맞는 타이핑 그룹보다 정보 입력시간은 많이 걸렸으나, 그 간극에서 정보를 선별해서 처리하고, 다른 감각기관을 활용해 기억력이 증가한다는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런 연구결과의 영향으로 미국 8개 주에서는 손 글씨 수업이 초등 교과과정 필수과목으로 의무화되었으며 이 같은 움직임은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그간 구시대적이며 답답한 행동으로 여겨지던 손글씨와 필사의 가치와 효과가 재조명받은 사례로 볼 수 있다.

사진 = 김훈 '라면을 끓이며' 육필원고, 문학동네 제공

사진 = 김훈 '라면을 끓이며' 육필원고,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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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로 마음을 안정시킨다

최근 서점가에는 초판본 디자인을 그대로 재현, 출간한 한국 고전 시,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함께 선보인 필사 책 또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매일같이 두드리는 키보드, 손으로 만지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엄선된 문장을 보고 엄지와 검지, 중지에 힘을 줘 펜을 들고 종이에 눌러쓸 때 스치는 마찰음과 종이에 남은 문장을 보노라면 마음이 정화된다고 표현하는 필사 애호가들의 감상을 듣노라면 새로운 ‘힐링’콘텐츠로 각광받는 필사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에 인간의 자리가 위협받는다는 위기의식이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 삶 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디지털의 편리성을 외면하거나 거부하며 사는 것은 도시생활자에게 있어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 하지만 미처 내가 잊고 있던 아날로그적 습관과 감성을 하나씩 되찾아 기꺼이 그 사소한 불편함을 감수하는 행동은 단순한 정서만 향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까지 이어져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연필로 글을 쓴다. 어깨에서 손끝까지 힘을 주고 꾹꾹 눌러 쓴다. 내 몸으로 글을 밀고 나간다는 육체감이 좋다. 확실한 내 몸으로.”

김훈 작가는 2013년 한 강연에서 온 힘을 실어 ‘쓰는’ 행위의 물성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비록 자신의 머리와 가슴에서 나오는 문장을 싣는 연필과 책을 보고 베껴 적는 필사자의 연필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이 육체감의 희열은. 하얀 종이 위를 채운 글자, 그 글자가 모여 이룬 문장을 바라보는 순간의 충만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자 성취가 아닐까. 누군가가 필사를 멈추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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