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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남 최고의 영화에 숨은, '작업의 정석' 4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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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 - 로저스 혁신이론으로 '러브어페어' 다시 읽기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자기가 중심이던 삶에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혁신’이라고 할 만 합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자 마음의 중심에 자기 스스로를 놓는 게 아니라 상대를 데려오는 낯설고 두려운 경험을 합니다. 스스로를 위해서 하던 많은 행동들이, 상대를 위해서 하는 행동으로 바뀝니다. 왜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가. 그걸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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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기주의자가 갑자기 이타주의자로 바뀌는 이 현상에는, 인간의 의지와 판단을 넘는 어떤 배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기주의는 존재가 목숨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한 조물주의 디자인이라면, 이타주의 혹은 사랑은 존재와 존재가 결합하여 또다른 생명체를 낳아 생명을 번성시키기 위한 그의 설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로저스의 채택이론은 한 사회에서 ‘혁신’이 어떻게 채택되는가를 정리한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생겨났을 때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물건, 새로운 문화, 새로운 현상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일정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사랑하게 되는 일 또한 ‘혁신의 채택’과 비슷한 과정을 겪습니다.

영화 ‘러브 어페어(Love Affair)’를 우리 말로 번역하면 ‘연애사건’이라고 해도 될까요. 하지만 미혼 남녀의 적절한 사랑이 아니라, 이미 짝이 있는 남녀의 부적절한 사랑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약혼자가 한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회사의 일 때문에 비행기를 탑니다. 역시 얼마 전 능력있는 여자와 약혼한 한 스포츠해설자가 있었습니다. 그 또한 어떤 업무가 있어 비행기를 탑니다. 풋볼스타였던 남자는 비행기 안에서 여자를 발견합니다. 천성적으로 바람둥이인 그는, 자신이 약혼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는지 바로 작업을 걸기 시작합니다. 우선, 그녀의 옆자리가 비어있는 걸 보고, 핑계를 만들어 거기에 슬쩍 앉아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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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스로 돌아갑시다. 그는 혁신을 채택하는 과정의 1단계를 인지(認知;awareness)라고 말합니다. '혁신'을 사랑이라는 파격적 사건으로 읽으면 됩니다. 남자는 마이크(워렌 비티)이고 여자는 테리(아넷 베닝)입니다. 마이크는 테리를 발견했고, 테리 또한 마이크를 발견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해서는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테리는 투자은행의 사장인 약혼자가 있다고 마이크에게 말합니다. 그녀는 이 은퇴한 스타선수가 잘 나가는 방송진행자와 약혼을 했다는 사실을, TV를 통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비행기가 가만히 탈없이 날아갔더라면, ‘인지’는 거기서 그쳤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알게 되었다고 상황이 바로 전개되는 건 아닙니다. 작업의 발생은 서로의 코를 꿸 상황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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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하던 비행기가 기관 고장이 일어나고 어느 섬에 불시착합니다. 우연히 두 사람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고, 바람둥이 남자는 여자에게 관심을 계속 보입니다. 여자 또한 뜻밖의 상황에서 테리를 응시하게 됩니다. 로저스는 이 단계를 관심(interest)의 단계로 표현합니다. 인지에서 관심으로 이동하는 상황은 경계를 그을 수 없을 만큼 미묘할 때가 많습니다. 아, 저런 사람이 있구나. 하지만 나는 이미 약혼을 했고 저 사람도 약혼을 한 사람이니, 더 가까이해서는 안되겠지? 이것이 ‘인지’ 단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면서 자꾸 보게 되고, 그러면서 상대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상대를 지속적으로 응시하는 행위가 ‘관심’ 단계의 핵심입니다. 이 영화에서 마이크의 명대사, “나는 당신이 움직이고 있는 걸 바라보는 게 좋습니다(I like watching you move.)”는 바로, 저 마음 상태라 할 만합니다. 인지 단계에서 마음에 금을 그어놓았던 것은 어쩌면, ‘에고’를 지켜야 하는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잘 유지되고 있는 자신의 삶을 파탄나게 할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한 선택입니다. 그런데, 불시착한 배 위에서의 파티, 그리고 키스. 여기서 여자의 분별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관심은 상대를 자기의 중심으로 데려오기 위해 빗장을 푸는 행위입니다. 하고싶은 마음과 해서는 안되는 마음이 서로 밀고 당기며,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는 불시착한 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섬에 살고 있는 마이크의 숙모 집에 함께 놀러가는 일이, 두 사람의 관계에 불을 지핍니다. 사실 테리는 저 바람둥이의 접근에 대해 전혀 확신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돌아가면 잊혀질 잠깐의 관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숙모를 만나면서, 테리가 좋아지기 시작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숙모와의 대화였습니다. 캐서린 햅번이 열연한 숙모는, 테리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인지 마이크에 대해 흥미로운 얘기를 해줍니다.

숙모 “오리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흉내는 잘 내는 편이지. 극단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어. 대체로 사기꾼들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감추거든. 하지만 오리로 치면 신용있고 정력이 넘치는 거지.”
테리 “그가 걱정되세요?”
숙모 “걱정된다고 말하진 않았어. 상대 마음을 읽는다고 착각하는 분별없는 여자는 아니겠지? 그래, 사실은 걱정돼.”
테리 “왜요?”
숙모 “내가 가졌던 걸 마이크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어. 난 운이 좋아서 뭘 원하는지 잘 알지.”
테리 “이젠 가정을 꾸리잖아요.”
숙모 “마이크는 자기가 백조인줄 모르고 추한 오리로 살고 있어. 자신이 오리인 줄 알고 계속 그렇게 살아가겠지. 백조를 만날 때까지.”
테리 “백조를 찾았는지도 모르죠.”
숙모 “그래, 상대를 찾았을 거야.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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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의 정석 3단계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누구냐? 그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가치를 지닌 삶이냐? 이 저울이 상대의 마음 속에 작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 나오는 백조와 오리에 관해서는 그 이전의 대화에서 설명됩니다. 백조는 일부일처제이며, 오리는 난교(亂交)를 하는 새입니다. 숙모의 말에는 마이크가 바람둥이처럼 보이지만 진실로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만나면 아주 성실하게 깊은 사랑을 할 거라는 암시를 하는 것이지요. 로저스의 이론으로 말하자면, 평가(evaluation) 단계라 할 만합니다. 테리는 마이크에 대해 호감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좋아해선 안될 사람’이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던 저울추를 옮겨, 좋은 사람이며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평가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할 만합니다. 하나는 관계 자체를 평가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관계는 더 발전되면 안된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져, 관계를 새롭게 수립하는 마음의 혁신이 일어납니다. 또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평가입니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깨지면서, 호감이 증폭되는 마음의 혁신입니다. '평가'가 작동되면, 굳센 방어막을 쳤던 상대의 마음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작업남의 미션은 사실 여기서 끝이 납니다. 그 다음은, 운명이 해주는 것입니다. '혁신' 또한 인간이 다 할 순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밀어주는 '우주적인 행운'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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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막바지에 다다릅니다. 관객들은 과연 이 두 사람이 엉뚱하게 생겨난 이 관계를 사랑으로 채택할까 하는 궁금증을 가집니다. 아니 이미 관객들은 둘이 결합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영화는 쉽게 그 관계를 채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둘은 일단 각자의 약혼자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관객들은 지금까지 진행된 관계의 힘을 믿는 쪽이지만 영화는 자꾸 상황을 불투명하게 합니다. 두 사람은 각자 잘 생각해본 뒤 사랑의 결심이 서면 석달 뒤에 만나자고 약속합니다. 이 석달이 바로 로저스가 말하는 ‘채택의 단계’입니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둘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이크 “지금 행복한가요? 난 지금까지 사는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충실하지 못했지만...나한테 모험을 한번 해볼래요? 나에게 시간을 줘봐요.”
테리“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마이크 “석달 어때요? 내가 만약 괜찮은 놈이라면 그곳에 나와 있을 거예요. (시계를 본 뒤) 5월 8일, 오후 5시 2분에 어디에 있을 것 같아요?”
테리 (창밖으로 보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보며) 저 빌딩 전망대 어때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아니지만...그곳을 못 찾지는 않겠죠?“

그 약속과 관련한 대화는 이 결정적인 삶의 전환에 관한 긴장감을 높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채택하겠다는 결심은 섰지만, 사랑은 상대가 있는 ‘관계의 문제’이기에 상대가 과연 채택할 지에 대한 불안은 남아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테리 “만약 둘 중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도 전화하거나 연락하지 않기로 해요.”
마이크 “좋아요.”
테리 “당신이 안 나온다고 해도 난 이해할 거예요.”
마이크 “난 나가요. 당신이 안 나와도 이해해요.”
테리 “난 나갈 거예요.”

돌아가서 두 사람은 각자 자기의 약혼자를 ‘정리’합니다. 그러나 이 만남은 차질이 생깁니다. 테리가 빌딩 꼭대기를 쳐다보며 뛰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때문이죠. 마이크는 혼자서 기다리다가 낙담하고 떠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크리스마스날에 재회를 하고, 드디어 둘은 제대로 된 사랑을 시작합니다.

영화 '러브 어페어'는 마치 로저스의 혁신이론을 설명하는 교과서처럼 느껴집니다. '인지 단계'의 비행기 내부, '관심 단계'의 배, '평가 단계'의 숙모네 집, 그리고 '채택 단계'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크리스마스 무렵의 병원. 물론 영화 감독 글렌 고든 카슨이 로저스의 이론을 참고한 건 아닐 겁니다. 마음 속에 '놀라운 변화'인 사랑이 채택되는 과정이 우연히 혁신 이론을 닮았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사랑의 풀코스는 사실, 이 영화가 숨기고 있는 불온함을 장식하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러브 어페어'는 이미 약혼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를 심문하는 영화입니다. '짝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랑을 하는 일, 그것이 '인생의 혁신'일 때, 사랑은 어떻게 채택되는가. 이걸 보여주는 겁니다. 이 선택은 만약, 영화 바깥으로 나온다면 그리 만만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영화는 '상상력 공장'입니다. 영화는, 사랑이 생겨나고 성장하는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만들어 불온한 외양을 장식한 뒤 "사랑은 어떤 의무감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진정한 선택"이라며 일상의 권태와 상식에 지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설정해놓고 그것이 사회적 금지를 넘어서는 게임을 즐기는 것이 이 영화가 공들여 준비하고 있는 서비스라 할 만합니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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