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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 파고다 그후 2년]2-① 윤 할아버지 교통사고…'7212 버스 출근'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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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5회차 주인공 윤 할아버지
지난 8월22일, 교통사고 골절상으로 입원
16년째 지정석처럼 썼던 그 좌석, 당분간 못 타
"이바구도 못해 공원도 못가…누워있자니 고역"


[그 섬, 파고다 그후 2년]2-① 윤 할아버지 교통사고…'7212 버스 출근'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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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주상돈 기자, 김민영 기자, 김보경 기자] "아이고, 이게 누구야. 바쁜 사람이 어떻게 전화를 다했어. 삼계탕 먹은 때가 작년 여름이니까 1년 만이네. 별 일 없고? 잘 지내지? 나야 뭐…. 실은 요새 파고다 못 나가. 얼마 전에 공원서 집에 버스 타고 오다가 사고 나서 누워 있어. 며칠 전에 수술하고 아직 병원이야."
2년 전 '그 섬 파고다' 기획기사 취재 차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귀찮게 해 드렸던 윤모(80) 할아버지께 9월 초 안부 전화를 드렸다가 달갑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평소처럼 종묘광장공원에 다녀오는 길에 버스에서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윤 할아버지는 그 섬 파고다 5회차의 주인공이었다. 할아버지는 2000년 아내를 먼저 보내고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파고다공원에 나가기 시작해 이태 전 만났을 때까지 14년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고 서울 금호동 자택에서 종로3가 공원까지 '파고다공원 출근 도장'을 찍었었다. 그 후에도 할아버지는 2년 가까이 '파고다 출근'을 거르지 않았다는데 갑자기 변이 난 것이다.

사고 소식을 들은 지 약 2주가 지난 9월15일 저녁 무렵 윤 할아버지가 입원해 있다는 서울 성동구의 제인한방병원을 찾았다. 윤 어르신은 불 꺼진 병실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기자가 알은체를 하자 할아버지는 "여기는 어떻게 왔대, 나 이제 괜찮아"라며 누워 계시라는 만류에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고는 "휠체어 좀 펴 봐. 바람 쐬러 나가게"라며 담배를 챙겼다. 2년 전 만났을 때도 파고다공원에 가는 버스를 타기 전에 늘 정류장 앞 낚시가게 '로터리 낚시회'에 들러 가게주인과 이바구를 나누고 담배를 물었었다.
"보조기 차시라니까 또 그냥 나오시네. 그거 안하면 큰일 나요." 병실을 나오는 길에 홍시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들고 온 윤 어르신의 큰 아들과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큰 아들의 성화에 다시 돌아가 보조기를 차고는 다시 휠체어에 앉았다. 목수 일을 하는 큰 아들은 얼마 전부터 윤 노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교통사고를 당한 어르신을 병원으로 모신 것도 큰 아들이다. 며칠 전에는 어르신을 모시고 이발소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아버지가 항상 계시는데 그날은 6시가 넘어서도 안 오시더라고. 이상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넘어져서 로터리 정류장에 앉아 계시다는 거야. 내가 가서 병원으로 모셨지."

윤 할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건 지난 8월22일. 이날 오전 어르신은 평소 다니는 서울 한남동의 순천향대학교병원에 들러 처방을 받았다. 종묘공원에서 오후를 보낸 어르신은 여느 때처럼 공원 건너편에서 7212번 버스를 타고 로터리 낚시회 건너편에 내렸는데 그때서야 하루 종일 들고 다니던 약봉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다음 버스기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반대편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옥수동을 돌아 로터리 낚시회를 지나는 버스에서 약봉지를 찾을 요량이었다. 30여분을 기다리자 정류장에 7212버스가 도착했다. 반가운 마음에 버스에 급히 올라 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사이 버스가 출발했다. 중심을 잃은 할아버지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버스 기사는 윤 어르신을 정류장 의자에 앉혀놓은 채 연락처를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찾던 약봉지는 그 다음 버스에 있었다. 동네 병원에서 이틀을 누워 있던 할아버지는 순천향대병원에서 오른쪽 고관절 수술을 받고 꼼짝없이 약 3주를 누워있어야 했다.

"병원에 가만히 있는 게 제일 고역이야. 담배 피러 나가는 데만도 한참이나 걸린다니까."

휠체어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윤 할아버지는 주차장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가 내 자리야"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문다. 윤 어르신이 평소 피던 라일락이 아닌 다른 담배다. "병원에서 누가 줬어. 내가 담배를 사러갈 수 있어야지. 아들 가기 전에 몇 갑 사오라고 해야겠어."

할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고 나선 자식들을 자주 본다고 했다. 큰 아들이 매일같이 퇴근 후 들러 할아버지를 살피고 버스 회사와의 보상 문제도 도맡아 처리한다고 했다. 지난해 결혼했다는 막내딸 소식을 묻자 윤 어르신 표정이 금세 어두워진다. "사위가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막내도 따라 내려가는 모양이야. 언제 가는지는 모르는데 가면 지금보다야 더 자주 못보겠지."

앉을 수 있게 된 뒤로 윤 어르신은 병원 뒤편 주차장에 자주 내려온다고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16년째 찾던 공원 대신인 셈이다.

하지만 이게 화근이었다. 갑갑하다며 수술 부위를 고정하는 보조기도 차지 않고 움직이다가 고관절에 다시 금이 갔다. 결국 이달 초 처음 수술한 순천향대병원에서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지난 12일 윤 어르신을 다시 찾았다. 이제는 앉지도 못하고 그대로 누워만 있어야 하는 신세다. 수술한 오른쪽 고관절에 더해 이번엔 허벅지까지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퇴원 시기도 한참이 미뤄져 적어도 한 달 이상 병원 신세를 면하기 어려워졌다. 윤 할아버지의 공원 나들이도 기약 없이 미뤄졌다. 윤 어르신이 종묘공원에 가기 전 매일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담배를 태우던 로터리 낚시회도 못 간다. 할아버지의 지정석이었던 7212번 버스의 앞에서 두 번째 자리도 한동안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될 것 같다. 종묘공원의 장기 맞수인 유 할아버지와의 대결도 몇 달 뒤에나 가능할지 기약할 수 없게 됐다.



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
주상돈 기자 don@asiae.co.kr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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