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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작곡가가 고향에 가지 못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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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윤이상

작곡가 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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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1917~1995)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 작곡가로 클래식 음악계의 거장으로 평가 받는다. 독일에서 활동하며 베를린 음대 교수를 역임했고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축하행사로 무대에 올린 오페라 '심청'이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유럽 평론가들은 '20세기 중요 작곡가 56인' 중 한 명으로 그를 꼽았고 생전 '유럽에서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 그가 세상을 떠나던 1995년 독일 방송은 그를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 중 하나로 뽑았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이 버린 작곡가였다. 그는 한 사건에 연루된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17일은 작곡가 윤이상이 태어난 지 98주년이 되는 날이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윤이상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사건은 1967년 발표된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예술인, 유학생, 교수, 의사, 공무원 등 194명이 동베를린에서 대남 적화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며 윤이상을 비롯해 미술계의 거장 이응로 화백, 물리학자 정규명 등 107명을 입건했고 31명을 구속했다.

동백림 사건으로 두 명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윤이상은 1심 무기징역, 2심 징역 15년, 최종 징역 10년이 확정됐다. 하지만 2년 뒤 이들은 모두 특사로 풀려났다. 인혁당 사건 등을 봤을 때 간첩사건을 조작하고 관련자들은 사형시키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던 정권이 동백림 사건에 대해서 그 같은 태도를 취하지 못한 것은 국제사회의 싸늘한 시선 때문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서독과 프랑스 등에서 관련자들을 납치하다시피 연행하면서 국제법을 어기는 등 심각한 외교문제를 일으켰다. 서독 정부는 한국 수사관의 자국 내 체포 활동을 주권 침해로 규정하고 공식 항의하면서 관련자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서독은 이후 재판 후 특별사면을 요구했는데 중형이 선고되자 한국에 대한 차관 승인까지 보류했다고 한다.

또 동백림 사건은 세계적인 저명 예술인들을 무리하게 잡아가면서 한국이 인권후진국으로 인식되게 했다. 재판 과정을 들여다보니 혐의와 법 적용이 터무니없다는 것이 국제사회에 알려진 탓이다. 세계 인권단체들이 항의에 나섰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같은 저명한 음악인들도 윤이상의 석방을 촉구했다.

결국 재판을 주시하고 있던 서방 국가들의 압력에 못 이겨 윤이상은 1969년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다. 2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뒤 71년 독일 국적을 취득했고 이후 입국이 금지돼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윤이상은 고국 방문을 원했지만 정부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995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동백림 사건의 배경에는 1967년 6월 8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당시 여당이 70%가 넘는 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전국에서는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열렸다. 이후 1969년 3선 개헌과 1972년 유신 선포가 이어졌으니 6.8 선거는 박정희 정권의 집권 연장을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7차례에 걸친 동백림 사건 수사 발표 이후 잠잠해졌다.

동백림 사건은 2007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조사를 거쳐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규모 간첩사건으로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 과장했으므로 정부는 관련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디아스포라'로 생을 마친 윤이상은 간혹 파블로 피카소와 비교되기도 한다. 피카소도 조국 스페인에 프랑코 정권에 들어서자 프랑스로 망명해 평생 스페인으로 돌아지지 못할 운명이 됐지만 여름이면 고향 말라가를 찾기 위해 몰래 입국했다. 프랑코도 이를 알았지만 스페인이 낳은 천재 예술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이를 묵인했다고 한다.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이 세상을 떠난 1995년까지 한국 정부에게는 유럽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프랑코가 가지고 있는 정도의 관용도 없었던 셈이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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