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물길을 바꿔라]⑦"대출 확대론 한계…생산적 금융, 투자 중심으로 가야"
가계대출 쏠림·자본 규제에 묶인 은행
리스크 회피가 생존 전략인 구조 바꿔야
창조·녹색금융 등 단순 대출 확대는 과거 실패 되풀이
자본시장 선순환 유도 시급
범정부 컨트롤타워 구축하고 '숫자'보다
'투자 질' 우선하는 장기 전략 필요
전문가들은 생산적 금융이 안착하려면 단순한 자금 규모 확대를 넘어, 금융 시스템 전반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기존처럼 '대출 확대' 방식에 머물 경우, 과거 창조금융이나 녹색금융이 마주했던 한계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정책의 초점을 '어디에 돈을 넣을 것인가'라는 배분 문제에서 '어떻게 돈이 흐르게 할 것인가'라는 시스템 설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규제에 묶인 은행, 리스크 회피가 생존 전략인 구조 바꿔야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29일 "과거에는 은행 대출의 80~90%가 기업 대출이었으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규제 강화와 정책 변화로 현재는 가계대출 비중이 70% 이상으로 높아졌다"며 "은행이 기업보다 가계대출에 집중하는 것은 단순히 수익 때문이 아니라, 현행 규제와 감독 체계가 그렇게 유도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러한 보수적 구조가 생산적 금융 확대와 충돌한다는 점이다. 기업 대출에서 부실이 발생하면 은행은 심사 책임을 지고 엄격한 제재를 받지만, 기업이 크게 성장하더라도 은행이 얻는 추가 수익은 제한적이다. 결국 은행은 수익 확대보다 손실 회피를 우선하는 의사결정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 또한 "상업은행은 건전성 관리가 최우선인 조직인 만큼, 리스크가 높은 기업 대출보다 안전한 개인 대출을 선호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관행을 깨기 위해서는 과도한 규제 완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안 교수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과 유동성 규제 등이 과도하게 적용되면서 은행이 사실상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며 "연말이 되면 규제 비율 한도에 걸려 기업 자금 수요가 높아지는 시기에도 대출을 공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고 짚었다. 자본비율 규제와 위험가중치(RW)를 일부 완화해 은행의 운신 폭을 넓혀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출은 빚일 뿐"… 투자가 중심이 되는 생태계 조성 시급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은행의 구조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정책 금융이 초기 위험을 부담해 민간 자본을 유도하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정책 금융이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떠안고 민간 자본이 뒤따라 들어오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며 "첨단 산업뿐 아니라 벤처 스케일업, 지역 혁신 등 모험 자본 공급이 전방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 녹색금융과 창조금융은 각각 기후 금융과 벤처 금융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인프라를 구축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녹색금융은 탄소배출권 거래제 도입과 녹색채권 시장 형성 등을 통해 기후 관련 금융의 기반을 마련했고, 창조금융은 창조경제혁신센터와 디캠프 등 창업 지원 인프라를 구축하며 벤처·스타트업 금융 생태계를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녹색금융이나 창조금융은 완결된 정책이라기보다 새로운 금융 영역을 만들어낸 데 의미가 있다"며 "관련 제도와 시장, 인프라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출 확대에 무게가 쏠리면서 자금 공급 방식 자체를 '투자'로 전환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현재 추진되는 생산적 금융은 과거 정책들보다 한 단계 확장된 개념이다. 특정 산업에 자금을 배분하는 수준을 넘어 금융 시스템 전반의 자금 흐름을 바꾸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과거의 한계를 교훈 삼아 자금 공급의 방식을 대출에서 투자로 옮기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 교수는 "기술금융, 녹색금융 모두 결국 특정 분야 기업에 대출을 늘리는 정책에 그쳤다"며 "자본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은행을 통해 자금을 공급하는 방식이 반복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의 원인으로 취약한 자본시장과 은행 중심 금융 구조를 지목했다. 김 교수는 "한국의 회수 시장을 보면 기업공개(IPO)가 90% 이상을 차지하고 인수합병(M&A)은 미미한 수준"이라며 "투자 자금이 순환되지 못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결국 자본시장과 관련한 제도 개선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IPO 중심의 회수 구조를 다변화하고 M&A 경로를 확대하는 한편 기업성장집합투자기구(BDC) 등 투자 수단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 투자 자본의 선순환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범정부 컨트롤타워 구축하고 '속도보다 질'에 집중해야
한국은 국가 채무와 재정 여력의 제약으로 중국처럼 대규모 보조금 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환경이다. 따라서 산재한 정책 자금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강력한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 교수는 "이미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모태펀드, 성장금융 등 정책금융 자금이 풍부하게 존재하는 만큼 이를 통합적으로 조정한 뒤 추가 자금을 얹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며 "현재는 자금 조달 구조와 투자 포트폴리오, 위험 배분 방식 등 기본적인 청사진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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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성과 지표나 자금 규모 등 '숫자'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도 잇따랐다. 신진영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목표 금액을 정해놓고 실적 쌓기식으로 투자하는 방식은 실패 확률이 높다"며 "민간과 협력해 투자 대상을 엄격히 선별하고 장기적으로 관리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석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역시 "단기간 성과를 위해 자금 집행을 무리하게 서두르면 투자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속도보다 투자의 질을 우선하는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채석 기자 chaes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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