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기발랄한 질문을 슬쩍 비틀면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배출하자'는 구호로 변신한다. '혁신의 아이콘'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우리의 소유욕이랄까. 언제부턴가 정부와 기업과 대학들은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육성하자"고 부르짖는다. 영웅의 재림을 염원한다. 그러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한 번 가정해보자. 정말 스티브 잡스가 이 땅에서 태어났다면.
그런 궤적을 대한민국에 대입하면 틀림없이 비루한 캐릭터가 배출된다. 질풍노도의 문제적 청소년기를 거쳐 변변한 대학 졸업장도 없는 '학연 지연 혈연'이 결핍된 3류 인생. 근본 없는 천덕꾸러기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겨우 외우고, 풀고, 시험보느라 지쳐가는 음울한 청춘. 경쟁에 허덕이면서 제 몸보다 더 큰 가방을 짊어지고 살아가다가 어느날 문득 편견과 차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패배적인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하는 궁핍의 삶. 스티브 잡스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투명인간이 되고 말았을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런 사회적 병폐는 나 몰라라 한 채 '잡스 나와라 뚝딱!'만 외치는 어른들의 입방정이라니. 얼마 전에는 초등학교부터 소프트웨어 교육을 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잡스가 어려서부터 코딩을 했다는 행적은 듣도 보도 못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도 어린 시절 밥 먹듯이 책을 읽으며 인문학적 교양을 쌓았고 코딩은 13살 이후 시작했다지 않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코딩을 주입식처럼 꾸역꾸역 시키면 제2의 스티브 잡스나 빌게이츠가 나올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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