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섯번째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
특히 이 시집은 '산문시'로 채워졌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만하다. 산문 형식에서도 운율과 리듬을 잃지 않고 서정의 특질을 모두 담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적 호흡을 유지하면서 산문과 시의 경계를 허물어야 달성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만큼 산문시는 문학적 성취가 어렵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야기, 즉 서사를 끌고 가기란 만만치 않다. 내면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편에서 최정례의 산문시들은 치밀하게 짜인 이야기 구조가 두드러진다. 또한 감성 언어와 서늘한 직관으로 “무사태평해 보이는 우리 삶의 일상"을 밀도 있게 그리며 때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지금 흐르는 이 시간은 한 때 어떤 시간의 꿈이었을 거야. 지금 나는 그 흐르는 꿈에 실려 가면서 엎드려 뭔가를 쓰고 있어. 곤죽이 돼가고 있어. 시간의 원천, 그 시간의 처음이 샘솟으며 꾸었던 꿈이 흐르고 있어.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달덩이가 자기 꿈을 달빛으로 살살 풀어놓는 것처럼. 시간의 꿈은 온 세상이 공평해지는 거였어. 장대하고 아름답고 폭력적인 꿈.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아픈 것들을 녹여 재우며 시간은 흐르자고 꿈꾸었어. 이 권력을 저지할 수 있는 자, 나와 봐. 이 세계는 공평해야 된다는 꿈. 아무도 못 말려. 그런 꿈을 꾸었던 그때의 시간도 자신의 꿈을 돌이킬 수가 없어. 시간과 시간의 꿈은 마주 볼 수도 없어."('시간의 상자에서 꺼내어 시간의 가장 귀한 보석을 감춰둘 곳은 어디인가?' 전문)
"폭설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눈처럼 시간이 뭉텅 사라져버렸다. 망가진 인공위성이 공중을 달려오는 사이 나는 전에 살던 사당동 708번지를 지나고 있었다. 집은 온데간데없고 거기엔 이수역 7번 출구가 서 있다. 그럴 리 없다. 내 기억이 고집스럽게 그걸 인정하지 않고 있다. 기억은 직조하듯 잘 나가다가도 느닷없이 움찔한다. 그 집은 가압류 당했다가 결국 날리지 않았던가. 벌써 수십년 전 얘기를 마음이 짜나가다가 찢는다. 전철 문이 스르르 열려 사람들을 뱉어놓고 다시 닫힌다. 근처를 지나던 블랙홀 속으로 나의 일부가 뭉텅 빨려들고 있다.('이수역 7번 출구' 부분)
시인은 전혀 연관이 없는 두가지 이상의 이질적인 현상이나 생경한 풍경을 기이한 문법으로 중첩시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가령 장갑 한짝을 잃어버린 사소한 일과 “목구멍에서 먹이를 토해 부화한 새끼의 입속에 넣어줄 짝을 기다”('한짝')리는 펭귄의 절박함을 교묘히 엮는 식이다. 또한 “사실이 비사실로 변해 가는”('이 길 밖에서') 일상 속에서 “뭔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 없”('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입구는 거기가 아니”라는('입구') 삶의 역설을 그려낸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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