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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례 시인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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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섯번째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최정례 시인(사진, 60)의 여섯번째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창비 출간)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주목할만하다. 이 시집은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전작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문학과지성사 2011) 이후 4년만으로 산문시라는 개성 있는 장르와 '이야기 구조'가 돋보인다. 특히 분방한 상상력, 독특한 화법과 문체를 통해 산문이 어떻게 시가 되는 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를 평론가 조재룡'은 “기획의 산물이며 시적 의식을 확장하고 넓혀내고자 한 사투의 결과”라고 평한다.

특히 이 시집은 '산문시'로 채워졌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만하다. 산문 형식에서도 운율과 리듬을 잃지 않고 서정의 특질을 모두 담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적 호흡을 유지하면서 산문과 시의 경계를 허물어야 달성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간 시는 행을 가르고, 연을 나누는 형식적 태도로 인해 '문학이 이야기'라는 본질을 곧잘 벗어난다. 즉 서정에 매달려온, 오랜 습성 탓에 서사의 깊이를 잃고 마는 예는 허다하다. 이번 시집에 대해 이수명 시인은 "산문시를 향한 탐험으로 인해 넓이가 더 광대하고 예측 불허가 되었다. 산문시란 무엇보다 시적 호흡을 벗어나고 시의 호흡이 보증해 주는 회복력, 탄성, 구심력 같은 것들을 넘어선다"며 "최정례의 시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번 시집으로 인해 더욱 예단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만큼 산문시는 문학적 성취가 어렵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야기, 즉 서사를 끌고 가기란 만만치 않다. 내면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편에서 최정례의 산문시들은 치밀하게 짜인 이야기 구조가 두드러진다. 또한 감성 언어와 서늘한 직관으로 “무사태평해 보이는 우리 삶의 일상"을 밀도 있게 그리며 때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지금 흐르는 이 시간은 한 때 어떤 시간의 꿈이었을 거야. 지금 나는 그 흐르는 꿈에 실려 가면서 엎드려 뭔가를 쓰고 있어. 곤죽이 돼가고 있어. 시간의 원천, 그 시간의 처음이 샘솟으며 꾸었던 꿈이 흐르고 있어.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달덩이가 자기 꿈을 달빛으로 살살 풀어놓는 것처럼. 시간의 꿈은 온 세상이 공평해지는 거였어. 장대하고 아름답고 폭력적인 꿈.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아픈 것들을 녹여 재우며 시간은 흐르자고 꿈꾸었어. 이 권력을 저지할 수 있는 자, 나와 봐. 이 세계는 공평해야 된다는 꿈. 아무도 못 말려. 그런 꿈을 꾸었던 그때의 시간도 자신의 꿈을 돌이킬 수가 없어. 시간과 시간의 꿈은 마주 볼 수도 없어."('시간의 상자에서 꺼내어 시간의 가장 귀한 보석을 감춰둘 곳은 어디인가?' 전문)
여기서 시인이 다루는 현실은 “도로변에 버려진 아이 신발 한짝 같은 심정”('거처')으로 “의미없이 하루하루를 지내”며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해”('존재의 서글픈') 살아가며 “기억인지 상상인지”('흙투성이가 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이다.

"폭설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눈처럼 시간이 뭉텅 사라져버렸다. 망가진 인공위성이 공중을 달려오는 사이 나는 전에 살던 사당동 708번지를 지나고 있었다. 집은 온데간데없고 거기엔 이수역 7번 출구가 서 있다. 그럴 리 없다. 내 기억이 고집스럽게 그걸 인정하지 않고 있다. 기억은 직조하듯 잘 나가다가도 느닷없이 움찔한다. 그 집은 가압류 당했다가 결국 날리지 않았던가. 벌써 수십년 전 얘기를 마음이 짜나가다가 찢는다. 전철 문이 스르르 열려 사람들을 뱉어놓고 다시 닫힌다. 근처를 지나던 블랙홀 속으로 나의 일부가 뭉텅 빨려들고 있다.('이수역 7번 출구' 부분)

시인은 전혀 연관이 없는 두가지 이상의 이질적인 현상이나 생경한 풍경을 기이한 문법으로 중첩시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가령 장갑 한짝을 잃어버린 사소한 일과 “목구멍에서 먹이를 토해 부화한 새끼의 입속에 넣어줄 짝을 기다”('한짝')리는 펭귄의 절박함을 교묘히 엮는 식이다. 또한 “사실이 비사실로 변해 가는”('이 길 밖에서') 일상 속에서 “뭔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 없”('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입구는 거기가 아니”라는('입구') 삶의 역설을 그려낸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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