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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스토리]한물 간 삶 같은 낡은 거리, 삼륜차는 오늘도 달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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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집중 시리즈 <67> 충무로·을지로 영화·인쇄골목

일제시대부터 영화관들 자리 잡아…한국전쟁 뒤엔 인쇄업체 모여들어
싸고 푸짐한 서민식당도 즐비, 서울 뒷모습 간직한 '문화재' 역할


도시의 삶의 진실은 지붕 위에서 내려다볼 때 좀 더 분명히 드러나는 듯하다. 을지로 한 고층 건물의 옥상 난간에서 아래쪽으로 내려다본 골목의 풍경은 고단한 서울살이의 굴절과 애환을 보여준다. 좁게 난 길들은 종횡으로 얽히면서 끊어질 듯 이어진다. 막혔구나 생각한 곳에서 문이 열리듯 새로운 길로 이어진다. 나무가 햇볕을 찾아 가지를 뻗듯 길과 집들,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뻗쳐 나간다. 부러졌다 펴지고, 막혔다가 트이고, 움츠러들었다가 펼쳐지는 골목의 풍경은 끈질긴 우리네 삶의 생생한 면모다.
▲ 서울의 대로변 뒷편 골목은 도시의 또 다른 얼굴. 고단한 서울살이의 생생한 현장이다. 을지로의 인쇄골목.

▲ 서울의 대로변 뒷편 골목은 도시의 또 다른 얼굴. 고단한 서울살이의 생생한 현장이다. 을지로의 인쇄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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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건물들이 적잖게 늘어선 충무로와 을지로3가역 사이 대로변 뒤편, 도심 속의 이 골목에는 거미줄 같이 나 있는 길을 따라 오래된 인쇄소와 작고 허름한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인쇄업체들이 여기에 모이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일제시대 때부터 이 일대에 자리 잡은 영화관들로 인해 영화 홍보 전단을 인쇄하는 업체가 생겨나면서 인쇄 골목으로 성장했다.

밤을 새워 일해야 밥값을 벌 수 있는 가난한 인쇄 노동자들을 위해 싼 값에, 그러나 밥 한 그릇에 다시 하루를 시작할 힘을 얻는 이들에게 정성을 다한 밥을 짓고 파는 가게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생겨난 길과 집과 사람들이 함께 나이를 먹었다.

▲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한 노동자가 짐을 옮기고 있다.

▲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한 노동자가 짐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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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 한 식당에 들어가 앉는다. 전라북도 남원의 처녀와 고창의 총각으로 만나 서울로 올라온 지 30년이 다 돼 가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주인 부부의 웃음이 사람들을 맞는다. 전남 장흥에서 새벽에 올라온 낙지로 연포탕을 끓여내는 이향임(55)씨가 이곳에 들어온 지 이제 1년 반. 이 골목,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이들과 벌써 많은 정이 들었다. 부안 출신 총각 정재수(61)씨를 만나 부부가 돼 서울로 올라와 살아온 지난 얘기를 들려준다. 10년 넘게 음식 장사를 하다가 식당 일이 힘들어 귀금속 가게를 내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식당일로 돌아왔다.
"식당 일이 맞는 것 같아요. 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참 좋은데, 그러려면 식당 일이 좋아요"하는 이씨에게 왜냐고, 묻자 이렇게 말한다.
"귀금속 가게 일을 하니 몸도 편하고 좋았어요. 그런데 금이나 보석은 비싼 거라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나도 그냥 줄 수가 없지만 음식은 얼마든 나눠줄 수가 있잖아요."

이 가게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이 부부는 돈을 받고 음식을 파는 것이 아닌 듯하다. 어질고 순한 마음을, 그 마음으로 만든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일이니 세상의 어느 성찬이 이보다 풍성할 수 있을까.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1년 밖에 안 됐지만 두 사람은 마치 오래 전부터 살아온 곳인 듯하다. 그러나 꼭 오래 살아야 고향인가. 가게 앞 쪽으로 나 있는 길을 건너 있는 시장을 죽 지나갈 때 만나는 간판들, 아산집, 양평집, 남원집, 진도집, 아마도 자신이 떠나왔던 곳의 지명을 내세웠을 그런 간판들이 아니라도 이 골목에서 동동걸음으로 걷다가 만나 애환을 나누는 이들은 나고 자랐던 곳이 어디든 누구라도 서로에게 고향이 되는 것이다.

이씨 부부에게도 남원의 들녘과 고창의 푸른 바다는 없지만 이곳이 고향이고, 이곳에서 만난 낯선 이들이 고향사람들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내오는 음식으로 하루의 근심을 잊게 되는 것은 무안이든 장흥이든 갯벌에서 잡혀 올라온 낙지의 맛 때문이 아니라 그 인심과 정과 사연과 마음씀씀이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골목은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 만난 누구에게든 술 한 잔에 자기 얘기를 털어놓고 싶어지게 하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골목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어떤 위안을 받게 되는 듯하다. 그런 은은한 기운이 있는 곳이기에 사람들은 저녁이면 이 골목의 낡고 허름한 식당에 모여 앉아 하루의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 을지로 골목을 50여년간 지켜 온 '우일집'

▲ 을지로 골목을 50여년간 지켜 온 '우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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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를 50여년간 지켜온 '우일집'. 어머니가 낸 가게를 딸이 이어받아 50여년을 지키고 있는 이 가게의 곱창 맛은 술꾼들을 멀리서 찾아오게 만들 만큼 일품이지만 이 집의 최고의 진미는 다른 데 있으니, 그건 술값이 모자란 사람에게는 그냥 가라며 인정을 베푸는 40대 여주인의 인심이다.

작가 이호철이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를 신문에 연재하던 1966년, 그해 '불도저'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취임하고 서울의 오래된 집들을 밀어붙이고 직선으로 뻗는 길을 놓기 시작할 때 서울의 인구는 350만명이었다. 해방을 맞을 때 95만명의 인구가 20년 만에 세 배로 늘었고, 다시 50년 만에 서울의 인구는 1200만명으로 또 세 배 이상 늘어났다.

을지로와 충무로의 골목은 그렇게 직선으로 맹렬하게 밀어붙인 도시개발의 기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다. 도시의 삶과 역사의 한 기념관이며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의 증언들이다.

우뚝우뚝 솟은 고층건물들이 서울의 랜드마크가 돼 가고 있는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할 또 하나의 랜드마크, 진정한 서울의 문화재는 아마도 이 골목, 이씨나 우일집의 여주인과 같은 이들, 그 골목의 삶에 있지 않을까. 을지로 바로 옆 청계천변의 공구상들 가게의 기계와 물건들이 만물상을 이루고 있듯 골목의 사람들이 펼쳐 보이는 '만인보(萬人譜)', 그것에 있지 않을까.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사진=백소아 기자 sharp204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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