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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스토리]대한민국 경제 박음질한 '시다의 꿈'…오늘도 미싱은 돈다

최종수정 2013.11.15 15:15 기사입력 2013.11.15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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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단을 꽉 쥔 두 손에는 숱하게 바늘에 찔려가며 의류산업의 한 축을 담당했던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땀, 그리고 이들이 청춘을 보낸 '창신동'의 역사가 모두 담겨 있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 원단을 꽉 쥔 두 손에는 숱하게 바늘에 찔려가며 의류산업의 한 축을 담당했던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땀, 그리고 이들이 청춘을 보낸 '창신동'의 역사가 모두 담겨 있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아시아경제 이혜영 기자] 타다닥 타다닥, 드르륵 드르륵.

장단을 맞춘 것 같은 기계소리가 조용한 지하 작업실 안을 가득 메운다. 손과 발은 기계와 한 몸이 된 듯 부지런히 위아래를 오가고 안경 너머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바늘을 향한다. 몇 초 사이, 삐져나와 있던 수백개의 실밥이 자취를 감추는가 싶더니 어느새 멋진 옷 한 벌로 변신한다.
하루에도 수천, 수만벌의 옷이 만들어지는 곳. 둘둘 말린 '천'이 '바지' '스커트' '재킷'의 이름을 달고 나가는 이 곳은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이다. '두타'와 '밀리오레' 등 쇼핑객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동대문을 도로 하나 사이에 둔 동네 골목에서는 바느질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그 작은 골목의 작업실 무지개빛 실타래들처럼 수많은 인생들이 무지개빛으로 펼쳐지는 곳이다.

헐벗은 50년대, 봉제공장 늘며 의류생산 1번지로
국내 기성복의 70%를 담당하기도 했던 '바느질의 도시'


'창신동'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방(坊) 가운데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글자를 딴 이름으로 1914년부터 이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1943년 동대문구에 편입됐지만 1975년 종로구로 재편입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울의 중심인 종로구 오른쪽 끝자락에 낙산을 배경으로 창신 1,2,3동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수도 중심에 위치한 덕분에 예부터 상권이 빨리 형성돼 온 창신동 주변은 한국전쟁 이후 갈 곳을 잃은 저소득 서민층이 대거 모여들면서 판자촌이 형성됐다. 뒷편에 솟은 낙산에서부터 비탈진길 층층이 쪽방촌이 생겨났고 인구가 늘면서 자연스레 시장이 들어서고 상권도 형성됐다.

특히 전쟁의 상흔으로 헐벗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옷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던 상황에서 창신동은 의류산업에 필요한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의류 생산기지로서의 창신동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섬유연보에 따르면 1955년에 국내 소비용 의류의 60%가 이 곳에서 만들어졌다. 창신동 미싱소리는 1961년 평화시장이 세워지고 화학섬유가 보급되면서 더욱 커졌다.

이후 주택가 지하와 1층을 중심으로 봉제공장이 속속 입주하면서 대한민국 기성복 전체 물량의 70%를 소화하는 수준으로까지 번창했다.
▲ 실타래 너머로 한 미싱사가 작업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 실타래 너머로 한 미싱사가 작업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 창신동 골목에는 원단과 옷을 실어나르는 오토바이가 쉴 새 없이 오간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 창신동 골목에는 원단과 옷을 실어나르는 오토바이가 쉴 새 없이 오간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20살 때부터 창신동에서 미싱사로 일해 온 김정임(55)씨는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일감이 수북이 쌓여있던 때가 있었죠. 화장실을 가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미싱을 박듯 순식간에 해치워야 했지만 그 덕에 애 둘을을 교육시키고 가족도 건사할 수 있었다"고 그 시절을 기억했다.

창신동 골목에 자리잡고 있는 봉제공장에서 김 씨를 비롯한 3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장인'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70~80년대 손가락을 바늘에 찔려 가면서 창신동 터줏대감이 된 이들은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을 이겨내며 의류산업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동대문이 패션1번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환기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곳에서 먼지를 마셔가며 일한 이들 '봉제공장의 장인들' 덕분이었다.

아직도 1960~70년대 머물러 있는 '미싱사' '봉제'에 대한 인식
젊은 인력 수급 어려워…"40대 중반이 막내"


동대문과 종로 상권은 빠르게 현대화되고 나날이 발전했지만, 창신동의 시계는 더디 흘렀다. 어깨에 짊어지던 원단은 이제 오토바이가 실어나르고, 잔고장으로 애를 태우던 미싱기를 비롯한 기계들도 최신식이 됐지만 창신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1960~70년대 어디쯤 머물러 있는 듯하다.

차경남 서울봉제산업협회 회장은 "미싱사라고 하면 아직도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직업에 3D 일을 하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우리는 평생 기술을 갖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노동자이지, 기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던 핍박받던 과거는 이제 이 곳에 없다"고 말했다.

세상의 편견은 창신동의 노동 수급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이 곳에서 35년간 몸담아 온 김기일 프로조이 사장은 "지금은 가장 어린 미싱사가 40대 중반일 정도로 젊은 층의 유입이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며 착잡해했다. 곳곳에 붙여진 '미싱사 급구'라는 구인 안내문은 행인의 눈길을 잡지 못한 채 간판 없는 공장의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저렴한 인건비로 위협해 오는 중국 시장과 동대문 상권이 조금씩 탄력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일을 배우려는 사람도 점점 줄자 창신동 주민들은 자구책을 찾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나 가정 폭력 피해를 입고 생계를 이어가는 데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쾌적하고 재밌는 동네를 조성하기 위해 예술가나 기업과 협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난관이 많다. 법적으로 고용할 수 없는 외국인 노동자가 많고 소규모로 운영되는 봉제공장은 사업자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 제도적인 뒷받침을 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종로구 일대 봉제공장은 2500~3000개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다. 정부도, 지자체도 그 동안 '창신동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 창신1동에 위치한 한 지하 봉제공장 한 켠에서 오늘도 그들은 미싱을 돌린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 창신1동에 위치한 한 지하 봉제공장 한 켠에서 오늘도 그들은 미싱을 돌린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땀의 댓가를 알아주는 이는 별로 없지만 오늘도 창신동의 미싱은 돌아간다. 낙산공원 뒷편으로 달이 얼굴을 내밀며 어둠이 깃들 때쯤, 뻗뻗해진 팔 다리를 주무르던 한 중년의 미싱사는 말한다.

"옷 속에 있는 한 뼘도 안되는 작은 브랜드 상표가 떨어지면 명품도 짝퉁이 될 수 있잖아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공장에 풀풀 날리는 먼지같이 작은 존재지만 없으면 안되는 그런 사람이요"


이혜영 기자 itsm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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