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번화가의 상징, '명동(明洞)'
19세기 말 개항, 상권 형성 물꼬
1960~70년대엔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지금까지 명맥 잇는 '양복점'과 '책 가게'
현재는 쇼핑한류 관광메카로 맹활약


▲ 명동의 거리는 언제나 인파로 북적인다. 전 세계인들이 모여 호흡하고 문화를 공유하는 '작은 지구촌'에는 요즘도 하루 평균 1백만명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중국어로 '명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명동의 이 같은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 명동의 거리는 언제나 인파로 북적인다. 전 세계인들이 모여 호흡하고 문화를 공유하는 '작은 지구촌'에는 요즘도 하루 평균 1백만명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중국어로 '명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명동의 이 같은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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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나석윤 기자] 역동적이다. 자유롭고 활기가 넘치며 왁자지껄하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대형상가 사이 거미줄처럼 뻗은 거리에는 어느 한 곳 예외 없이 인파가 북적인다. '명동(明洞)'이라는 글자 그대로 사방엔 밝은 기운이 감도는 듯하다.

어떤 이에겐 다채로운 쇼핑공간, 어떤 이에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자유지대 또 어떤 이에겐 잠시나마 지친 심신을 달래는 휴식공간, 그리고 또 많은 이들에겐 땀방울을 쏟아내는 삶의 터전인 곳. 우리나라 '번화가'의 상징이자 수도 서울의 '밝은 얼굴'인 곳. 그 밝은 빛을 쐬러 하루에 평균 100만명이 찾아오는 곳, 명동이다.


26일 찾아간 명동은 늘 그렇듯 밝고 활기차 있었다. 이 곳을 우리나라 '유행의 1번지'로 꼽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했다. 조선 초 한성부 남부 '명례방(明禮坊)'으로 불리다 일제강점기 '경성부 명동'을 거쳐 해방 후인 1946년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명동은 어느덧 내국인들은 물론이고 쇼핑백 서너 개씩을 든 외국인관광객들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인들이 즐겨 찾는 '쇼핑의 메카'로 발돋움했다.

▲ 지난 1898년 건립된 이후 11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명동성당'. 당시 종현언덕에 세워졌다고 해 '종현성당'으로 불렸던 이곳은 해방 이후 '명동성동'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지금은 명동의 상징이자 광광명소가 됐다.

▲ 지난 1898년 건립된 이후 11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명동성당'. 당시 종현언덕에 세워졌다고 해 '종현성당'으로 불렸던 이곳은 해방 이후 '명동성동'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지금은 명동의 상징이자 광광명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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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은 일찍이 도성 안에 위치해 있어 시장이 형성되기 용이했고, 사람들의 왕래도 잦았다. 1870년대 개항, 문호개방이 이뤄져 일본과 청나라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이곳에는 본격적으로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일본인들은 조선의 양반들이 밀집해 있던 북촌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입문턱이 낮았던 남촌 인근으로 파고 들어왔고, 명동에는 일본인들의 중심가가 조성됐다. 일본인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명동의 몸집도 커졌다.


명동이 걸어온 길과 남긴 발자취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적 측면에 그치지 않는다. 천주교에 대한 모진 탄압이 이뤄지던 시절 건립된 '명동성동'은 한 세기가 넘은 지금까지 그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1936년 준공된 옛 '국립극장'은 지금은 '명동예술극장'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여전히 명동을 떠나지 않고 남아 명동의 상징물이 됐다.


▲ 1936년 세워진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 연극상영 전용극장으로, 건립 당시에는 2층 높이에 800여명의 관객을 수용했다. ‘호동왕자’, ‘햄릿’ 등 1년에 5편 정도의 연극이 선보였다. 1971년 장충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국내 유일한 국립극장이었다.

▲ 1936년 세워진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 연극상영 전용극장으로, 건립 당시에는 2층 높이에 800여명의 관객을 수용했다. ‘호동왕자’, ‘햄릿’ 등 1년에 5편 정도의 연극이 선보였다. 1971년 장충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국내 유일한 국립극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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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명동의 진정한 주인공들은 문화ㆍ예술인들이었고, 젊은이들이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 명동에는 작가와 화가 음악인들이 몰려들었다. 명동의 다방과 술집에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박인환, 세월이 가면)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차를 마시며 인생을 얘기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그들을 따라 젊은이들이 집결했다. 그렇게 명동은 '유행'을 선도하고, '낭만'을 공유하며, '멋'을 뽐내는 해방구로 자리매김했다.


1960~1970년대 지금은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진 세대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3.1다방'과 '명곡다방', '봉선화다방' 등은 명동에 다방 붐을 불러일으켰고, '쉘브르'와 '마돈나', '문예살롱' 등에는 한 곡의 노래로 시름을 덜고자 했던 청춘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당시를 주름 잡던 디자이너들이 명동을 근거지로 모여 패션문화가 발달하면서 각종 양화점이 문을 열고, 서양의 유명브랜드 제품이-물론 대부분이 '짝퉁'이었지만- 젊은 남녀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


명동의 '그 시절'은 이제 색 바랜 사진이나 TV 속 흑백영상으로나 나올 법한 '옛날이야기'가 됐다. 지금의 명동은 대형 쇼핑센터와 화장품매장, 커피전문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1950년 개업한 이후 60년 넘게 명동을 지켜왔다는 한 양복점 점주는 "1960~1970년대 명동과 을지로 일대에 양복점이 많이 생겼고 당시에는 정재계 유명인들이 직접 옷을 맞추러 오는 경우도 많았다"며 "지금은 대부분이 없어져 명동 주변에는 서너 곳 정도만이 명맥을 잇는 것으로 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 1977년부터 36년 째 명동을 지켜온 '제일서림'. 성인 두세 명만 들어가도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비좁은 내부는 손때 묻은 책들로 가득했다. 색 바랜 제일서림의 간판이 세월의 흐름을 짐작케 한다.

▲ 1977년부터 36년 째 명동을 지켜온 '제일서림'. 성인 두세 명만 들어가도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비좁은 내부는 손때 묻은 책들로 가득했다. 색 바랜 제일서림의 간판이 세월의 흐름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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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학생들과 문인들 사이에서 책을 사고파는 관문으로 여겨졌던 명동 초입의 서점가 역시 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세월의 흐름 속에 종적을 감췄다. '문예서림'이라는 신간서적상의 개업을 시작으로 명동 일대에는 문인들이 많이 찾는 만큼 서점도 늘어 한때 10여곳이나 됐다.


그러나 1977년 문을 열어 36년째 영업을 하고 있는 '제일서림'의 빛 바랜 간판 옆으로 지금은 각종 포장이사 및 배달업체와 음식점들이 들어 차 있다. 성인 두세 명이 들어가면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비좁은 서점 안에는 곳곳에 손때가 묻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그 사이로 옛날 책들에서 풍기는 냄새가 코 끝을 맴돌았다.


이곳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당시만 해도 책 한 권 구하기가 어려워 꼭 필요한 책이 있으면 여기저기를 찾아다녀야 했다"며 "배고프고 가난하던 시절 술값이 없었던 글쟁이들이 책을 가져와 돈으로 바꿔가는 일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고 옛 기억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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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로입구역에서 명동으로 이어지는 거리 초입에 세워져 있는 나석주 열사 의상. 나석주 열사는 1926년 12월 일제강점기 토지수탈기관으로 악명이 높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현 외환은행 본점)에 폭탄을 던진 후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을지로입구역에서 명동으로 이어지는 거리 초입에 세워져 있는 나석주 열사 의상. 나석주 열사는 1926년 12월 일제강점기 토지수탈기관으로 악명이 높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현 외환은행 본점)에 폭탄을 던진 후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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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은 국제화되고 있는 서울에서도 국제화된 동네다. 연간 명동을 방문하는 외국인관광객은 600~700만명. 우리나라를 찾은 관광객 10명 중 6~7명은 명동을 들른다는 얘기다. 이 같은 세계화 추세에 맞춰 명동은 지난 2006년 말 관광특구에 이름을 올려 관광지로서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하고 있다.


명동은 서울의 그 어떤 곳보다도 우리의 생활상과 시대상을 온전히 담고 있는 '흔적'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살아 있는 '기록'이다.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내는 명동. 그 분주함이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와 만난다면 서울의 심장부는 좀 더 풍요로운 이야기가 흐르는 공간이 되지 않을까. 그럴 때 명동은 '어제'와 '오늘'이 공존하며 좀 더 '밝은 곳'이 될 듯하다.


나석윤 기자 seokyun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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