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3장 화실이 있는 풍경 56
포도나무 밭 옆 윤여사의 빈 화실.
깊은 물밑 같은 정적 속에 혼자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자니, 하림은 문득 자신의 처지가 마치 낯선 별 어딘가에 불시착한 우주인처럼 느껴졌다. 생각하면 우스웠다. 그리고보면 인생이란 자기가 꼭 원하는 방향으로만 가고 있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연이 필연보다 더 많은 게 인생인지도 몰랐다. 그날 동묘 앞에서 윤여사를 만난 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었고, 그 우연에 따라 자기가 이 시골 구석으로 들어와 지금 이곳에 누워 파란 줄무늬 커튼이 달린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었다. 그것뿐인가. 혜경이를 만난 것도, 오다가 하소연이란 여자애를 만난 것도, 오자마자 이장이란 사내를 만난 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일 것이었다. 인생은 그 우연의 연속에 의해, 우연하게 흘러가는 한바탕의 소설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우연의 줄거리 속에서 마치 자신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야할 무언가가 있는 사람처럼 기를 쓰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라면 봉지를 뜯어 스프와 함께 냄비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가 김이 풀풀 나는 냄비 째로 싱크대 앞에 놓인 탁자 위에 올려놓고, 김치와 함께 후후거리며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저수지 쪽에서 청둥오리 우는 소리 같은 게 희미하게 들려왔다. 혼자 먹는 라면 맛은 어쩐지 고독의 냄새를 풍겼다.
라디오에선 여전히 양희은이 넉살좋은 목소리로 ‘팔오공사님’ ‘이칠삼팔님’ 어쩌고 저쩌고 하며 사연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것 역시 생각하면 우스웠다. 감옥소에 가면 죄수들에겐 이름 대신 번호가 붙는다고 한다. 이를테면 전두환은 ‘이이삼사’ 노태우는 ‘일칠팔사’ 이상득은 ‘칠팔칠팔’ 식일 것이다. 시인 이육사도 진짜 이름이 아니라 감옥소 수번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이름 대신 번호를 붙여준다면 어떻게 될까.
“아, 이번 대통령 선거는 ‘일이삼사님’ 대 ‘사공사공님’ 의 대결이 되겠습니다.”
라든가,
“‘이삼사오’가 ‘사칠삼삼’ 의 지갑을 훔쳐 달아나다가 지나가던 행인 ‘공공사오’에게 잡혔다고 합니다.”
라는 식의 뉴스가 흘러나올 것이고, 그러면 바락바락 자기 것 주장하며 살려고 하는 이 경쟁적인, 너무나 경쟁적인, 정글과도 같은 세상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며 하림은 고독한 표정으로 혼자 라면을 국물까지 후후거리며 먹어치웠다.
라면을 먹고나자 다시 할 일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처음 온 동네를 휘휘거리며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모든 것은 주파수가 맞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이 느린 공기, 이 느린 시간, 이 느린 공간과 익숙해지기까지는 절대로 서둘러서는 안 되는 법이다. 빠르게 뛰는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성철스님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저 아래 절에서 삼천배부터 하고 오라고 시켰다지 않는가. 그러면 백 마디를 해도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도 한두 마디만 해도 다들 족하여 돌아갔다지 않은가.
하림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아까처럼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라디오에서 여섯시를 알리는 시그날이 흘러나왔다. 양희은이 사라지고 대신 사무적이고 감정없는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나와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누워서 보니 어느새 손수건만한 창문 밖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새 방바닥이 제법 뜨끈해졌다.
뉴스를 들으며 하림은 자기도 모르게 슬핏 잠이 들었다.
글 김영현.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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