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3장 화실이 있는 풍경 52
“여기 처음이세요?”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여자애는 흘낏 하림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리고는 호기심을 참지 못했는지 먼저 물었다.
“그런 셈이죠.”
하림은 전방에 시선을 던진 채 대답했다.
“그런 셈이라니? 그러면 그렇고, 아니면 아니지, 그런 셈이 뭐예요?”
여자애가 불만스런 목소리로 따지듯이 말했다. 하림은 그녀의 스스럼없는 말투에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듣고 보니 그런 셈이네요.”
“어머나, 처음 보는 아저씨가 날 놀리시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차 태워 달라는 사람은 어떻구요? 어쨌거나 나, 아저씨 아니거든요.”
“후후. 아저씨 아님 뭐라 해야 하나....?”
노랑머리 푸른 점의 여자애가 다시 하림의 옆 얼굴을 한번 흘낏 쳐다보며 놀리듯이 웃었다.
하림은, “내가 그렇게 늙어보이나?”
그러면서 백미러에 비친 자기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
“암튼 됐네요. 아저씨든 오빠든 그냥 아무렇게나 불러요. 그나저나 여기 사세요?”
“예. 아저씬 근데 살구골 어디로 가나요. 이 부근은 내가 다 아는데.....”
“그래요....?”
하림은 문득 그녀가 어쩌면 적시에 나타난 구원투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여사 말만 듣고 막연하게 떠나왔던 살구골이었다. 아는 사람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찾고 싶은 심정일 때였다.
“여기 혹시 서양화가 윤아무개라는 아줌마가 하던 작업실 아나요?”
“작업실?”
“예. 저수지 근처에 지어놓은 조립식 가건물이라 하던데.....”
“아, 재영 이모네 화실...!”
여자애가 소리를 질렀다. 하림은 자신의 예감이 맞아 떨어진 것 같아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예. 그래요! 윤여사, 아니 윤재영 씨네 화실.”
“알아요. 근데 거기 오랫동안 비어있었는데.....?”
여자애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하림 쪽을 돌아보았다. 쌍꺼풀 진 눈이 영화배우 오연수랑 손톱만큼 닮았다. 하림은 그런 그녀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난 윤재영 아줌마 숨겨둔 애인이걸랑요. 그래서 날더러 거기 가서 좀 놀면서, 빈 화실도 좀 손 좀 봐달라고 부탁을 했지, 뭐예요.”
“예.....?”
여자애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림은 내친 김에 계속 말했다.
“인사부터 해요. 난 장하림이라고 해요. 그냥 하림이라고 불러요.”
“아저씨 글 쓰세요?”
“아니, 왜요?”
“아까 보니 차 안에 책이 많아서요.”
“아하! 눈치가 빠르시네요. 아직 별 볼일 없긴 하지만 장차 유명한 작가가 되려고 궁리 중이랍니다.”
하림은 여전히 장난스런 말투였다.
“우리 동네에도 나이 든 시인이 한 분 사시는데.... 우리 아저씨 뻘 되는 사람인데.... 닭도 키우시고, 좀 독특한 분이신데..... 원하면 나중에 소개시켜드릴게요.”
“그래요? 근데 아가씨는 이름이 뭐예요? 앞으로 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피이. 딴 생각하지 마세요! 나도 애인 있으니까.”
그렇게 지레 차단막을 친 다음,
“이름 듣고 웃으면 안 돼요?” 하고 미리 언질을 주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