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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스토리]⑭와우산 등산객님, 노국공주·공민왕 사랑하는 것 보고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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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흥창터 공민왕 사당

마포 광흥창역 근처 공민왕 사당. 고려말 개혁군주의 사당이라고 하기엔 초라해 보인다

마포 광흥창역 근처 공민왕 사당. 고려말 개혁군주의 사당이라고 하기엔 초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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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광흥창 부군의 사당
국제결혼한 고려말 공민왕
아이와 아내를 잃고 난 뒤
비탄에 빠져 파멸의 길을 걸었지
세월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가
최영장군과 느티나무 호위 받으며
찾는 이 없어 편안해 보여


노국공주와 공민왕

노국공주와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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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이대로가 좋으니라."

지난 26일 찾은 공민왕 사당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42-17번지. 광흥창 터. 지하철로 보면 6호선 상수역과 광흥창역 중간에 위치해 있다.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뒤로는 와우산이 넉넉한 생각의 공간을 제공한다. 지금은 한강을 볼 수 없다. 높은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 한강 전망을 막아서고 있다.

공민왕 사당은 그렇게 조용히 세월을 이겨내고 있었다.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무심코 지나가면 이곳이 고려 말 개혁군주의 사당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이미 잊혀진 이름이고, 기억하고 싶지 않는 세상이 돼 버렸는지도. 모진 세월을 함께 해 온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만이 외로운 공민왕의 벗이었다. 180년 된 회화나무는 나무둘레가 260㎝이고, 218년 된 느티나무는 255㎝를 넘는다.

공민왕은 고려 말,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국제 결혼(?)한 그는 노국공주와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사랑을 나눈다. 공민왕 사당은 노국공주도 함께 봉안돼 있다. 회화ㆍ느티나무와 함께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함께 조용히 누워있다. 또 한 명의 인물, 최영 장군도 공민왕 사당에 같이하고 있다.

이쯤 되면 한 방송국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가 떠오른다. 광흥창터는 말 그대로 농수산물의 집산지였다. 조선 시대 관원들의 녹봉으로 지급될 양곡을 저장하던 곳이다. 서강을 거슬러 올라 광흥창터에 이르면 넉넉함과 결실의 가을을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다. 공민왕은 자주 이곳 서강을 찾았다.

왕이기 이전에 시화를 즐겼던 풍류 시인이자 화가였던 그는 서강에서 자주 시회를 열고, 그림을 그렸다. 세월을 잊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자주적이고 개혁적 고려를 만들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현실에 지치고, 버거울 때마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서강에 올라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 이후 그가 누워 있을 장소를 생각했을 것이다.

공민왕 사당을 지키고 서있는 수령 180년 된 회화나무

공민왕 사당을 지키고 서있는 수령 180년 된 회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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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공민왕 사당을 올라 와우산으로 오르고 있었다. 길을 재촉하는 아이를 굳이 붙잡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알아욧! 이거, 옛날 집이잖아요!"라고 대답한다. 싱겁다.

그래 옛날 집이긴 하다. 아이에게는 공민왕 사당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당 뒤편으로 이어져 있는 '마포구 걷고 싶은 길'에 있는 지도 모른다. 공민왕 사당 뒤편은 와우산이다. 와우산으로 오르는 산책로는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아기자기한 길을 만들어 주고 있다.

계단으로 이어져 산 중턱에 이르면 산길이 나타난다. 공민왕도 와우산을 올랐을까. 산은 그대로 있지만 이제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역사를 알려고 하지도, 굳이 알고 싶지도 않는 21세기 사람들이다.

사당 지붕이 비바람에 오랫동안 씻겨 아주 낡아 있다.낙엽이 두텁게 쌓여 있고, 부러진 나뭇가지가 널려 있다. '공민왕 사당'이라는 하얀색 현판은 오래된 흔적을 남긴 채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에게 공민왕 사당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공민왕 사당 앞에는 간단한 운동을 할 수 있는 체육공원이 조성돼 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어떤 곳인지 아느냐"는 기대도 않고 던진 질문에 "당연히 안다"라고 말했다. 싱거운 초등학생과 달랐다. 반가웠다. 공민왕을 알고, 사당을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뿐만 아니었다. 할머니는 공민왕 사당이 마포문화원으로 이관되기 전에 이곳에서 매월 음력 10월초에 공민왕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

"20년 전 동네 사람들이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사당 뒤편에 있는 큰 바위에 걸어놓고 제사를 지냈다. 누가 시킨 게 아니라, 공민왕을 기리고 또 복을 기원하기 위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다."

이명자 할머니(72)는 20년 전, 지금의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이 지역의 부녀회장이었다. 이 할머니는 "제사를 지내면서 음력 10월초에 공민왕 사당에 지역 주민들이 모여 같이 먹고 마시고, 지역민들이 두터운 우정을 나누던 곳"이라고 말했다.

공민왕이 죽어 후세들에게 좋은 터를 제공한 셈이다. 같이 모여 이야기 나누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니 공민왕은 복 받은 군주가 아닐까.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로 따가운 햇살이 내리비쳤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할머니는 사라지고 벤치에 홀로 앉아 더위를 식혔다.

땀이 식을 때쯤 공민왕 사당을 지나 '마포구 걷고 싶은 길' 와우산으로 향했다. 와우산은 해발 79m 정도의 높지 않은 산이다. 낮은 산이지만 재미가 있고, 느낌이 좋다.

공민왕 사당을 지나 와우산을 오르면 홍익대학교와 신촌으로 이어지는 앙증맞은 산책길이 여럿 있다. 오르는가 싶더니 바로 정상, 거리로는 짧은 산책길이지만 상념의 거리는 길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혼자 고즈넉하게 가을을 느끼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아직 낙엽이 물들지 않았지만 조금 있으면 붉은 색이 더없는 정취를 던져줄 것이다. 홍대생들과 지역 주민들에게는 휴식처이자 생각의 장소다.

주온야한(晝溫夜寒). 낮에는 덥지만 밤에는 차가운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이고 있다. 와우산을 오르는 젊은 여성의 모습에서 가만히 다가오는 가을이 느껴졌다.

조금 지나면 겨울이 올 것이다. 흰 눈이 내려 공민왕 사당도 하얗게 물들어 갈 것이다. 아파트에 둘러 싸여 답답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가을을 느끼고, 넉넉한 생각의 공간이 필요하다면 공민왕 사당과 와우산으로 달려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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