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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서울 2012 가을'…"보고싶다. 존경받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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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 고희를 넘어선 작가와 비 내리는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하고 싶었다. 반세기 서울이 어떻게 변했는지, '시대의 스승' 김승옥 소설가(71)에게 물어보기 위해서는 포장마차가 어울리는 공간이라 생각했다. 포장마차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서울, 1964년 겨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여귀(女鬼)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았던 '무진기행'의 안개로 인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작가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원로작가 김승옥 작가는 뇌졸중으로 지금 언어기능에 장애가 있는 상태였다. 다른 부분은 이상이 없는데 병마는 작가에게서 언어를 뺏어갔다. 더욱이 김승옥 작가는 "예전 김지하(시인)가 감옥에 가고 시대가 암울할 때는 술로 분노를 삭였지만 영화감독들이 술 때문에 죽어가고…지금은 술을 거의 안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5일 김승옥 작가는 대한민국예술원상 문학부문을 수상했다. 등단 50주년(그는 1962년 '생명연습'으로 등단)에 의미 있는 상을 수상했다.

▲김승옥 소설가는 "아비와 아들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사진=정재훈 기자]

▲김승옥 소설가는 "아비와 아들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사진=정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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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대학로에 위치한 오래된 카페 '모차르트'에서 김승옥 작가를 만났다. 언어 장애로 인터뷰는 필답으로 이뤄졌다. 조금은 느리게, 펜으로 글씨를 또박또박 썼지만 인터뷰 내내 김승옥 작가는 서울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내비쳤다. 때론 추억에 잠겨, 때론 현실에 분노하며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1964년에도, 2012년 지금도 서울에는 자살이 일어나지. 하지만 달라. 내 작품 '서울 1964년 겨울'에 나오는 자살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2012년 자살은 아니야. 돈 때문에, 이혼 때문에 자살하는 거지. 이건 끔찍한 현실이야."
'서울 1964년 겨울'에는 소외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머니에 돈 푼이나 생겨야 거리로 나올 수 있는, 자본으로 소외돼 있는 '김', 부동산만 대략 삼천만 원쯤 되는 부잣집 장남이지만 역사로부터 소외돼 있는 '안',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 시체를 돈을 받고 병원에 판, 사랑으로부터 소외돼 있는 '서적 외판원'.

자본과 역사, 사랑으로부터 소외돼 있는 세 사람이 우연히 포장마차에 앉아 1964년 서울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서울 1964년 겨울'에 그려져 있다. 김승옥 작가는 이 시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부터 재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즈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엉망이야. 옛날에는 권위적이었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했고, 아버지는 아들을 믿었어. 그런데 지금은 어때? 돈 있는 집안 자식들은 모두 미국으로 가버리고, 돈 없는 아비의 자식들은 잘못된 길로 가서 끝내 감옥에나 가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돈으로 맺어져 있어. 존경과 신뢰가 없어. 그러니 사회가 엉망이 된 거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회복이 절실해."

▲필답하는 김승옥 작가[사진=정재훈 기자]

▲필답하는 김승옥 작가[사진=정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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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학교폭력, 해체되는 가족, 성범죄, 불황 등 암울한 서울에 대해서도 '시대의 스승'은 한마디 했다. 김승옥 작가는 "나이가 젊을수록 무신론자가 많고, 나이가 들수록 교회를 찾는 사람이 많다"며 "믿음과 종교를 통해 이 현실의 우울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해체되는 가족 공동체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김승옥 작가는 "예전에는 허물어져 가는 집일지언정 단독주택에서 가족이 함께 모여 살았지만 지금은 층층이 쌓여 수많은 벽으로 차단돼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며 "가족은 함께 모여 사는 시스템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대화가 사라지고, 신뢰가 없으며, 가족 공동체가 허물어지고 있는 2012년 서울의 시대 현실에 대해서 슬픈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학창시절 동승로(그는 1960년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를 누비고 다녔던 김승옥 작가는 "당시 대학생들은 다방보다는 빵집에 많이 몰려 다녔다"며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승옥 작가는 서울에서 '선(善)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조언했다. "천만 명의 서울 사람과 어울려 사는 최선의 미덕은 싫은 때는 싫다고 말하는 것"이라며 "서울에서의 선(善)이란 자기 의견을 솔직히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 1964 vs 2012 상전벽해'

1964년 서울 인구는 342만 명이었다. 지금은 3배 증가한 1049만 명에 이른다. 집은 없어도 자동차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울 사람들. 1964년 서울의 자동차대수는 14만대에 불과했다. 지금은 21배나 증가한 297만대를 자랑한다.

1년 간 서울시 예산은 어떻게 변했을까. 1964년 서울시의 1년 예산은 54억 원이었다. 2012년 서울시의 예산은 무려 32조 원에 이른다. 물가 차이를 감안하지 않은 단순 계산이지만 규모 면에서 본다면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964년 서울시청사.[사진제공=서울역사박물관]

▲1964년 서울시청사.[사진제공=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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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기본요금에 이르면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1964년에 버스기본 요금은 50환(5원)이었다. 2012년 서울시민이 내는 버스 요금은 1050원이다. 김승옥 작가도 당시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50환이었는지 35환이었는지 헷갈린다고 말했다.

누구나 좋아하는 자장면 값은 1975년 187원이었다. 지금은 가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평균 5000원에 자장면을 먹을 수 있다.

우울한 통계자료도 있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자살률. 통계가 잡히기 시작한 1983년 서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458(10만 명당 4.9명)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0년 서울에서 자살한 사람은 2668명(10만 명당 26명)에 이른다. 갈수록 증가하고 있어 서울의 슬픈 단면을 보여준다.

여러 가지 통계자료에서 빠르게 변한 서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4년과 2012년, 상전벽해의 반세기가 지났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여전히 이곳 서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정종오 기자 ikok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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