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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뛴 50년·뛸 50년]"부지런한 한국인, 공사 더 줘라" 사우디 국왕도 인정

최종수정 2012.07.02 10:50 기사입력 2012.07.0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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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건설 붐..수출역군 9만명 해외로
중화학 집중 육성, 연평균 11.2% 고속성장
도매물가 상승률 40% 인플레 고통 이면도


[아시아경제 오현길 기자]1960년대가 화학·정유공업 기반 조성 총력을 통한 수출드라이브 시대였다면 1970년대는 격변하는 세계 경제환경 속에서 고도성장 시대를 연 황금기였다.
황금기를 구가하던 1960년대 세계경제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환경에 직면했다. 국제통화질서의 변혁, 석유파동, 신보호주의 대두 등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변화를 겪으면서 세계 경제는 1970년대 초반 불황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특히 1973년과 1979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석유파동(Oil shock)은 세계 각국에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안겼다. 1차 오일쇼크는 1973년 10월6일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이 석유전쟁으로 비화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석유공황' 사태를 초래하게 됐다.

1960년까지 지속된 무역자유화 흐름은 1970년대에 들어서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기축통화인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낮아진 반면 EC와 일본의 부상으로 미국이 국제무역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한국은 1960년대 가파른 경제성장에 힘입어 정부와 국민 모두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고취된 상황이었다. 1970년대 기본전략도 수출주도형 고도성장 지속을 내세웠다. 고도성장 시대로 이끌기 위해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수립, 시행했다.

3차 경제개발계획 기본목표로 ▲농어촌 경제의 혁신적 개발 ▲수출의 획기적 증대 ▲중화학공업의 건설 등 3가지 핵심사안을 선정했다.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공업은 바야흐로 중화학공업화 시대에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 정책을 선언하는 바 입니다”라며 중화학공업 정책을 적극 추진할 것을 천명했다.

이에 철강·비철금속·기계·전자·조선·석유화학 등 6개 중화학공업 업종을 선정해 철강공업은 포항, 비철금속은 온산, 기계와 전자는 창원과 구미를 거점으로 선정하고, 조선은 거제도, 석유화학은 여천으로 본격적인 단지 개발에 나섰다. 그 결과 1973년 포항제철이 쇳물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1973년 12월에는 현대조선중공업이 설립되면서 조선업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정부의 강력한 육성 의지와 자금 및 세제 등의 정책적인 지원에 힘입어 중화학공업은 빠르게 발전했다. 중화학공업이 총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70년 13%에서 1979년에는 38%로 크게 늘게 됐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중화학제품의 수출이 늘면서 해외시장 정보를 입수하거나 신규 시장을 개척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는 종합무역상사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1975년에는 삼성, 쌍용, 대우, 국제, 한일 등 5개사가, 1976년에는 고려, 효성, 반도, 선경, 삼화, 금호 등 6개사, 1978년에는 현대, 율산 등 2개사가 종합무역상사에 선정됐다.

중화학 중심의 산업 육성과 종합무역상사를 통한 수출 시장 개척으로 이 기간 연평균 11.2%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고성장을 달성했지만, 반대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면서 1974년에는 국내 도매물가 상승률이 무려 40%를 넘었다. 성장으로 인한 부작용이 발생한 것이다.

이 같은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은 산업 간 불균형도 심화시켰다. 공업부문과 농업부문,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산업과 내수산업 간의 불균형성장이 더욱 확대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70년대 성장의 또 다른 주역은 건설업이다. 국내 건설업체들은 막대한 오일달러를 축적한 중동시장에 진출해 달러를 벌어들임으로써 오일쇼크에 빠진 한국경제를 위기에서 구하는 구원투수로 떠올랐다.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수주해 중동시장에 사실상 첫 진출했으며, 이어 1976년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했다. 이 공사는 전체 금액이 무려 9억4000만달러로 당시 우리나라 예산의 25%에 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국내 근로자의 중동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1975년 6000명, 1976년 1만8700명, 1978년 무려 9만명 이상이 해외건설 현장에 나갔다. 당시 이들이 보여준 강인한 정신력과 근면함은 한국 근로자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야간에 작업현장을 지나던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 크게 감탄을 하면서 “저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들에겐 공사를 더 주어야 한다”고 지시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건설 근로자들이 보여준 불굴의 모습들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줘 이후 한국 기업들이 세계 각지의 해외시장에 진출하는데 긍정적인 효과로 작용하게 됐다.

1964년 한국은 수출 총액 1억달러를 돌파한 이후 1970년대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한다. 1971년 10억달러 달성에 이어 1977년 12월 수출 100억달러를 처음으로 넘어서게 된다. 이로써 세계 무역 규모에서 수출과 수입이 모두 1%대를 차지하면서 세계 시장의 일원으로 당당히 참여하게 됐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당시 수출의 날 행사는 이 같은 업적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현대조선중공업은 6억달러탑, 삼성물산은 5억달러탑을 수상했다. 이어 대우실업 4억달러탑, 국제상사와 현대종합상사는 3억달러탑의 주인공이 됐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2차 오일쇼크로 급격한 성장률 둔화와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된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제4차 경제개발계획 기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5.5%로 당초 목표인 9.2%에 훨씬 못 미쳤다. 특히 1979년 발생한 10·26사태는 박정희 시대의 종말과 함께 고도경제성장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오현길 기자 ohk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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