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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리더십]기아차 쾌속부활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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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저 추진력(하) '남들의 5년은 그에겐 1년이었다'

1999년 3월. 정몽구 회장은 부친인 정주영 명예회장과 함께 기아차 화성공장을 전격 방문했다. 정 회장은 수개월간 쉬지 않고 기아차 정상화 기틀을 마련한 후 그 결과를 부친에게 보였다.

1999년 3월. 정몽구 회장은 부친인 정주영 명예회장과 함께 기아차 화성공장을 전격 방문했다. 정 회장은 수개월간 쉬지 않고 기아차 정상화 기틀을 마련한 후 그 결과를 부친에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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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일권 기자] "1년 안에 회사를 정상화해야 하는데…"
1998년 12월 초, 기아차 대표이사로 취임한 정몽구 회장은 취임 직후 김수중 당시 현대자동차 사장(현 캠스 회장)을 불러 이 같은 고민을 토로했다. 시장에서는 '부실덩어리인 기아차를 사들인 후 현대차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 '기아차가 정상화되기까지 최소 5년은 필요하다'는 얘기가 한창 떠돌던 시기였다.

김 사장은 정 회장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정상화가 쉽지 않다는 보고를 받은데다 기아차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측근에 따르면 정 회장은 취임 직후 기아자동차 중역의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인수 전 실사 등을 통해 기아차의 현황을 확인한 상태였지만 회장으로 취임한 후 들여다본 실상은 더욱 심각했다는 이유에서다. 재무제표 상의 수치는 거론하지 않더라도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공장에서는 부품을 빼돌리는 등의 모럴해저드가 끊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 보다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이 컸다.

정 회장의 측근은 "당시 MK회장이 어떻게 정상화를 시킬 것인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오전 회의 시간에 참석 임원들에게 "출근하려고 새벽 3시부터 기다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같은 달 중순 정 회장은 김 사장을 기아차 사장으로 발령했다. 취임 직후 김 사장을 별도로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김 사장은 기아차에 오자마자 회사 살리기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 마련에 돌입했다. 결국 잘 팔리는 차를 만드는 노력이 최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낙후된 디자인과 파워트레인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원인이 나오자 정 회장은 저돌적으로 기아차 살리기에 착수했다. 일년 안에 정상화해야 한다며 기한도 다음해인 1999년 12월1일로 못박았다. '절대 불가능하다'는 반응이 회사 대내외적으로 나왔지만 정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차례 회의가 이어졌다. 정 회장은 매일 새벽 6시30분 출근하자마자 회의를 소집했다. 생산판매 점검회의, 품질회의, 본부별 사업목표 실적점검회의 등 종류도 다양했다. 구조조정과 함께 판매 실적을 확인하고 독려를 반복했다.

오전 회의 후 혼자 생각하다가 도저히 못 참으면 같은 날 오후에 다시 불러들일 정도로 회의를 자주 열었다. 다시 한번 철저히 점검하기 위해서다. 특히 품질회의에서는 매 회의때마다 15개 이상 부품을 전시해 놓고 원인과 책임을 가리며 개선내용을 직접 확인했다. 카니발, 스포티지 등 전차종이 대상이었다.

취임 첫달인 1998년 12월은 그렇게 정신없이 저물어갔다.

◇"엔진공장을 개조하라"
정 회장이 예상과 달리 1년이라는 기한을 명시한 것은 역설적으로 기아차의 저력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인수 당시 기아차 IR팀에서 근무했던 한 직원은 "타이탄, 복사 등 상용차와 승용차인 프라이드 등은 오히려 현대차의 경쟁차종을 능가했다"고 평가했다. 현대차를 비롯해 포드 등이 기아차 인수를 위해 3차 입찰까지 벌일 정도로 치열했다는 게 그 증거라고 했다. 정 회장이 기아차의 기술적인 저력을 믿었기에 목표를 공격적으로 설정했다는 얘기다.

정 회장의 트레이드마크인 현장경영은 1999년 새해벽두부터 시작됐다. 취임 후 일주일 만에 기아차 화성공장(당시 아산만공장)을 전격 방문한 바 있는 정 회장은 다음해가 시작되자마자 문제점 파악을 위해 일주일에 두세차례씩 화성공장(당시 아산만공장)과 소하리공장, 광주공장을 찾았다.

공장과 서비스 현장을 방문하면 품질회의 때 확인한 품질실태를 다시 점검하는 등 품질과 고객 불만사항은 유별날 정도로 철저히 챙겼다. 대신 임직원들에게 전년도에 지급하지 못했던 상여금 450%와 연월차 수당을 지급해 사기를 북돋았다.

1999년 3월 초, 화성공장을 또 다시 찾은 정 회장은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첫 순서는 엔진공장 개조였다. 당시 기아차는 카렌스와 세피아 등에 T-8D라는 엔진을 장착했는데, 매연이 많이 발생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 엔진은 기아차가 1994년부터 생산하던 비교적 최신 엔진이었다.

갑자기 엔진공장을 바꿀 것을 지시한 것은 기아차의 파워트레인이 구형인데다 성능도 미달이라는 지적을 접했기 때문이다. 조립보다 더 중요한 자동차의 심장을 바꾸지 않는 이상 기아차 회생도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이 시기 정 회장은 조립공장보다 주물, 엔진 등 차의 성능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품공장 파악에 주력했다.

이를 위해 정 회장은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25년 이상 엔진만 생산한 전문가 홍석종 상무를 비롯한 세명의 엔진 핵심인력을 화성공장으로 발령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빠른 시일 내에 공장을 완성하라는 임무도 덧붙여졌다. 2년 정도 소요될 것이라는 설비 개조공사는 불과 1년만에 마무리됐다.

차종 라인업도 바꿨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차는 모조리 단종시켰다. 2000년 한해 동안 크레도스와 프라이드, 아벨라, 세피아 생산이 중단됐고 2001년에는 포텐샤, 2004년에는 SUV인 레토나가 단산됐다. 당장 수익성을 따질 정도로 한대의 생산이 아쉬운 때였지만 정 회장은 과감히 옥석을 가리는 작업을 이어갔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차종은 카니발이다. 1998년 1월 출시된 카니발은 밴 스타일로 많은 인기를 끌었는데, 정 회장은 이것만큼은 단산 계획에서 제외했다.

김동진 전 현대차 부회장은 "카니발은 기아차에서 생산된 차종 가운데 소비자들의 인기가 가장 많았다. MK 회장은 카니발 생산과 판매를 정상화해 기아차를 살리는데 필요한 캐시카우로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카니발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품질 강화를 지시했다. 또 연간 20만대 생산체제를 갖추기 위한 새로운 도장공장 건설 등 신규 설비 투자도 명령했다. 그 결과 단위공장별 시간당 생산성(UPH)도 크게 높아졌다. 2000년 생산대수(UPH)는 기존 18.7대에서 30대로 향상됐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2001년 카니발은 13만대 이상 팔리면서 소형차 리오에 이어 기아차 내 판매 2위에 오르기도 했다.

1999년 4월 초, 생산과 판매가 안정을 찾으면서 정 회장은 기아차 화성공장에서 열린 KBS 열린음악회에 기아차 임직원들과 함께 참석했다. 기아차 임직원들이 현대의 일원이라는 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당시 대리였던 기아차 중간간부는 "현대차 인수 이후에 대한 불안감이 상당히 높았으나 생산성도 높아지면서 점차 회사가 활기를 띠었다"고 회고했다. 이 같은 배경으로 인해 기아차 노사는 그해 무분규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 회장이 언급했던 시한인 1999년 12월 1일이 다가왔다. 이날 기아차에서는 인수 1주년을 기념하는 아무 행사도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98년 48만889대였던 기아차의 판매대수는 1999년 85만5700대로 두배 가까이 늘었다. 자본잠식 상태에서 1년 만에 1357억원의 순이익을 남겼다. 남들이 5년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기아차 정상화는 그렇게 실현됐다.
기아차 화성공장 전경.

기아차 화성공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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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ㆍ기아차 시너지의 근원, '플랫폼 공유'
이를 바탕으로 2000년 기아차는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탄력이 붙기 시작하니 훨씬 수월해졌다. 잇단 차량 단종과 동시에 정 회장은 빠른 신차 출시를 종용했다. 크레도스 대신 옵티마를, 프라이드 및 아벨라 대신 리오, 세피아 후속으로 스펙트라를 각각 공개했다.

기아차 부활의 숨은 공로자는 또 있었다. 바로 현대차와의 플랫폼 공용화였다. 플랫폼당 최대 1500억원의 비용이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함과 동시에 부품도 같이 쓸 수 있으니 가격이 내려가는 것은 당연했다. 이는 현대차에도 이득이 됐다.

정 회장은 기아차 인수 직후부터 현대차 엔진을 기아차에 적용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기아차 품질 수준을 단기간에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가격경쟁력 확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알고 있었다.

2000년 7월 현대차와 기아차 플랫폼 공유계획에 따른 첫번째 차량이 탄생했다. 현대차 EF쏘나타의 플랫폼을 사용한 옵티마가 그 주인공이었다. 안전성을 대폭 높였고 소음과 진동을 줄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아차의 부족한 제품 구성을 보완하기 위해 정 회장은 옵티마뿐만 아니라 경차인 비스토, 미니밴 카스타, 소상용 파맥스를 계속 공급했다. 이는 기아차의 매출과 이익을 개선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옵티마 출시이후 기아차의 생산성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소하리공장 내 리오 생산라인의 UPH는 24대에서 29.3대로, 화성3공장은 33.3대에서 40대로 늘었다.

기아차의 조기 정상화는 '현대ㆍ기아차'라는 브랜드의 출발점이었다.



MK리더십 특별 취재팀(이정일ㆍ채명석ㆍ최일권ㆍ김혜원ㆍ조슬기나 기자)
MKl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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