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떠나는 전라도 여행[9]
임동확의 수화 김환기의 고향 안좌도 여행<4>
바다에 곧바로 떨어지는 수많은 빗방울 또는 해질녘 반짝이는 물이랑을 연상시키는 그의 색점들은, 따라서 변화무쌍한 자연현상의 배후에 절대로 변치 않는 불변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 서구 플라톤주의와 거리가 멀다. 또한 기계적인 분할이나 조화의 산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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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작가들의 색점 또는 색면들이 다른 것들과 엄격한 구분과 경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오히려 그의 색점화들은 언제든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 자세가 되어 있는 물방울과도 같다. 서구의 추상화가 근본적으로 타자를 적대시하고 배척해온 사유체계의 반영이라면, 수화의 점화들은 타자들과 언제든 친화하고 공존할 자세가 되어 있는 동아시아인 또는 한국인의 심성을 닮아 있다.
수화의 점화들은 동아시아인 또는 한국인의 심성을 닮아 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수화의 색점들은 잘나거나 못나거나 그 나름으로 위대한 한 생명, 하나의 개성적인 단자(monad)를 상징한다. 어찌 보면 지극히 하잘 것 없는 하나의 색점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저마다의 표정을 가진 채 혼신의 힘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을 나타낸다. 그저 무심히 찍은 듯한 색점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꽃으로 피어나는 세계. 화면 전체를 주로 푸른 점들로 온통 채우는 그림들은 마치 한 날 한시에 피어나는 군집(群集)의 온갖 꽃처럼 장엄한 화엄의 세계를 드러낸다.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점화 속의 소용돌이는 또 어떤가.
한 때 나는 그것이 급속하고도 종종 격동적인 세계 제일의 현대 도시 뉴욕생활에서 오는 현기증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 바 있다.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꺼이 그 세계적 도시의 리듬과 율동에 적응해가는 과정 속에서 얻는 소용돌이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우연히 파블로 네루다의 시 <시>를 떠올리면서 나는 나의 생각을 바꾼 바 있다. 그 소용돌이는 필시 수화가 무심히 색점들을 찍어가는 도중에 문득 찾아온 마음의 고양 또는 우주와의 일체감과 관계되어 있다고.
그리고는 문득
하늘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봤어요.
하늘이 열리고
위성들과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으로
난도질당한 그림자
나를 에워싸는 밤과 우주를 봤어요.
그리고 나, 이 미약한 존재는
그 커다란 공허에 취해
신비의 모습 그대로
별이 총총한 허공에 도취되어
나 자신 어느 심연의
순수한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을 느꼈지요.
네루다처럼 수화 김환기는 낯선 뉴욕의 하늘 아래서 광목천에 유화 붓 대신 동양화 붓으로 색점을 하나둘씩 정성스레 찍어가는 동안, 어느 순간 문득 기존의 익숙한 하늘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정신적 희열을 맛본다. 일체의 인위나 가식을 벗어난 무심과 무위의 경지에서 기존의 자아가 해체되고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생성의 세계와 만난다. 그야말로 그 커다란 공허와 신비감에 도취되어 심연의 순수한 일부가 되는, 자신을 에워싸는 밤과 우주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경험한다.
$pos="C";$title="";$txt="천사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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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수화 김환기의 고향 바다를 찾아 나선 것도 그 탓이다. 현대 아방가르드 미술의 방종 또는 정신분열적 예술행위와 거리가 먼 그의 그림들을 통해, 나는 낯선 것과 고유한 것 사이의 창조적 대결을 생각해본다. 변기를 분수라고 우겨대고, 물감을 지향 없이 마구 뿌려대는 예술적 기만성과 무정부성에 휩쓸리지 않는 그의 화가적 자세를 통해,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낯선 문화와 상호교감의 대화의 장을 마련할 수 있는 열린 예술의 세계를 꿈꿔 본다.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그야말로 모든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은 듯한, 무심과 무위의 자연성에 의지한 그의 예술적 경지를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욕망이 나의 발길을 이쪽으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화 김환기 생가를 다시 찾던 날. 건물 관리인은 보이지 않은 채 보수공사로 인부들의 발걸음만 분주하다. 그래도 뭔가 허전해 방문을 열어보니 수화 김환기의 복사 그림만 을씨년스럽게 방안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하룻밤 묵을 곳을 찾기 전에 시간 여유가 있어 돌아본 안좌도의 천사의 다리. 갯벌 생태 학습장 위에 세워진 구름다리 위를 걷는 맛이 제법 그럴 듯하다. 국내 최초의 갯벌체험 관광지라는 안좌도 두리를 기점으로 박지도와 반월도를 잇는 총 연장 1,462m 자랑하는 이 다리의 또 다른 자랑은 야경. 그 길이만큼 켜진 현란한 불빛들 사이로 저녁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저녁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pos="C";$title="";$txt="목포 북항을 오가는 농협배. 온통 내부가 수화 그림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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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그런데 ‘천사의 다리’라니! 신안 지역과 서구의 의미의 천사(angel)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여객선에 비치된 안내책자를 보니 신안의 전체 섬이 ‘천사의 섬’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통일된 지역 이미지의 고양을 위해서라고 해도,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신안군 소속의 서남해안에 산재한 1969개의 섬 가운데 무인도를 제외한 1004개의 유인도를 근거로 한 ‘천사(天使)의 섬’ 명명이 뭔가 낯설고 인위적인 느낌이다. 작위성 탓일까, 왠지 모를 거부감과 이질감이 마음속을 떠다닌다. 문득 읍동항에 하선하기 전, “자은도에만 무려 63개의 예수교회가 있다”는 박경진 목사(52)가 말이 새삼 상기된다.
안좌도와 팔금도, 암태도와 자은도 사이를 잇는 연륙교가 놓여있는 탓으로 취재차량을 타고 그 섬들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내게 미지의 섬인 자은도에서 일박하고 일어난 아침. 간밤에 내린 폭우로 어제 저녁 묵었던 모텔 앞 도로와 식당들이 침수되거나 패여 있다. 자은도 주민들도 몇 십 년 만에 겪는 물난리인 탓인지 포구로 향하는 길 옆 논밭과 농산물 가공공장 등이 물에 잠겨 있다. 도로 위까지 물이 넘쳐 흘려 선착장으로 가는 취재차량의 통행을 방해할 정도이다. 오후에 폭풍주의보가 내릴 가능성이 있어 아침도 거른 채 서둘러 안좌도 읍동항으로 향하는 차안의 라디오는 그 날 밤 자은도에 전국 최고의 강수량을 기록했다고 전한다.
안좌도가 낳은 세계적 화가에 대한 경의일까. 아니면 일종의 유행인 지역 브랜드화의 연장선상일까. 서둘러 목포 북항으로 향하는 농협배 안. 수화 김환기 그림들이 선실의 벽과 천정, 그리고 선장실 밖을 장식하고 있다. 서울 부암동 소재 ‘환기미술관’이 있다지만, 진품 유작 하나 없는 생가 방문의 서운함이 조금 가신다. 이렇게나마 전문가들만이 아닌, 일반인들에 그의 미술세계가 알려지는 것도 차차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문득 그러다가 나는 “세계 인류의 보편문법에 도달하는 길은 주변부의 민족 언어를 통하는 길밖에 없다”는 노엄 촘스키의 말을 떠올린다. 이와 동시에 “모든 철학은 고향에 대한 향수다”라는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의 말을 기억해낸다. 나는 수화의 그림들이 도달한 지점이 바로 주변부 중의 주변부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고향바다를 통해 보편성의 세계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모든 그의 예술 또는 그림들이 근본적으로 고향 안좌도와 그 인근 바다에 대한 추억 또는 향수와 관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pos="C";$title="";$txt="김환기 가옥 안내판(左)와 화가 김환기 표지석(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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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미귀(未歸) 혹은 불귀(不歸)의 작가의 고향 안좌도의 바다와 점점 멀어지고 있을 때, 굵은 장맛비가 곧바로 그 바다 속으로 떨어져 들어간다. 나는 그 무수한 빗방울과 그의 색점들을 연결시켜본다. 그러자 금세 바다로 떨어진 한 방울의 비와도 같은 그의 색점들은 백자 항아리처럼 깊은 추억을 품고 필사적으로 또 다른 색점을 향해 기꺼이 손을 내민다. 슬퍼할 새도 없이 곧장 바다로 합세해간 빗방울 같은 색점들 속엔 제가 떠나온 유년의 하늘과 바다, 달과 섬들이 저만의 거대한 우주가 스며든다.
자신도 모르게 고향의 기억에 입술을 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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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우린 화려하거나 이름 없거나 간에 저마다의 안좌도. 제각기 다른 한 세계를 고집하고 옹호하면서도 홀로 고립되어 반짝이지 않는 자기만의 빗방울.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저만의 바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하나의 중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설령 빠르거나 느리거나 간에 우리는 그 어떤 식으로든 귀향길에 들어서고 있다. 마치 엄마 곁에 자던 아이가 한밤중에 무심히 제 어미의 젖꼭지를 물듯이 자신도 모르게 고향의 기억에 입술을 대고 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금세 큰 바다와 한 몸이 되어버린 빗방울 하나하나가 그 나름의 존재의의를 갖는 것이라면 살아있는 날들의 허무와 불안, 방랑과 좌절은 한낱 엄살. 순식간에 바닷물과 뒤섞여 그 존재감을 잃어버리는 무수한 빗방울들이 하나의 색점이 되어 영원한 현재의 시간을 호흡하고 있다면, 그걸 아쉬워하거나 애달아하는 건 일종의 넌센스가 아닐 것인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여름비의 바다 속에서 나는 자신의 작품과 홀로 맞대면하며 무한대의 고독감을 맛보았을 수화를 생각한다. 낱낱의 빗방울 또는 모든 잔물결 같은 그의 색면들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을 전체. 마침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게 될 광대무변한 불멸의 바다를 훔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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