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통같은 비밀유지로 세계 부유층들의 절대적 신뢰를 받아온 스위스 은행들의 금융 비밀주의의 빗장이 풀린다.

미국에서의 탈세방조 사건을 계기로 중세부터 이어져 내려온 비밀주의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29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오는 4월 2일 런던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조세피난처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등 고삐를 단단히 조일 전망이다.

◆상상을 초월한 '비밀주의' 실상 = 스위스의 금융 비밀주의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TJN에 따르면 조세피난처에 맡겨진 부유층 자산의 3분의1 가량이 스위스에 있으며 자금은 총 2조~3조5000억달러 가량으로 보여진다.

스위스은행이 부유층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은 자산 운용 수완이 탁월한데다 예금자의 개인정보를 엄격하게 지켜왔기 때문이다.

특히 스위스 금융 비밀주의의 비난 여론에 빌미를 제공한 UBS는 세금신고서류 위조는 기본이고, 미 당국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스위스 신용카드를 만들거나 심지어 다이아몬드를 치약 튜브에 숨겨서 옮긴 사실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2004년에는 미국인 고객을 위해 무려 900개의 유령회사까지 차릴 정도였다.

UBS의 이 같은 비리가 탄로나면서 세계 각국의 비난 여론에 불씨를 제공, 사실상 스위스의 비밀주의에 종말이 예고되고 있다.

이와 관련, 피에르 미라보 스위스은행가협회 회장은 "은행의 비밀을 지킬 의무는 성직자·의사와 같다"며 "스위스에서 비밀주의는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위스 비밀주의 '위기' = 미국 부자들의 탈세방조 혐의를 조사하고 있는 미 수사 당국은 UBS에 대한 수사 강도를 높여 탈세의혹이 강한 미국인 300명에 대한 정보를 UBS에 요구,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미국에서의 영업면허 취소나 본사 간부의 형사 소추도 불사할 것이라고 강요하고 있다.

신문에 따르면 세금 회피 목적으로 미국 부유층들이 조세도피처로 자금을 빼돌리는 바람에 미국의 세수는 매년 1000억달러가 새어 나가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부터 '스톱 조세피난처 악용법'을 추진해온 만큼 이번에는 반드시 도입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미라보 회장은 UBS가 미국측에 정보를 제공한 데 대해 "그것은 미 당국과 UBS의 문제이지 스위스의 비밀주의와는 관계없다"며 스위스의 비밀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제 시민단체 조세정의네트워크(TJN)의 스위스인 관계자 브루노 글루트너는 "미국인 등이 탈세할 수 있는 구조를 스위스의 제도가 제공해 온 셈이나 마찬가지"라며 "그 시스템도 붕괴될 듯하다"고 말했다.

스위스는 지금까지 '조세포탈'과 관련, 예금 당사자가 속한 나라의 세무 당국이 정보를 요구할 경우에만 고객의 정보를 제공해 왔다.

그러나 서류위조 등을 동반한 적극적 '조세포탈'과 단순히 자산을 옮겨 숨겨둔 '단순탈세'를 구별하고 있다. 다만 일본 등 대부분의 국가와 달리 조세포탈은 탈세로 간주하지 않아 정보도 외국 당국에 건네주지 않는다.

조세포탈의 경우에도 정보를 제공하려면 재판소의 판단이 필요하며, UBS의 경우에도 마땅히 그것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미국의 강한 압력에 스위스 정부가 이례적으로 그 절차를 생략했다. 이는 스위스 정부마저 그 원칙을 저버린 셈이어서 스위스 은행에 대한 세계 부유층의 신뢰감은 한층 더 흔들리고 있다.

제네바금융재단의 이반 픽테 이사는 "해외에서 자산을 맡기려는 고객이 없어지면 국내총생산(GDP)의 12%를 차지하는 스위스의 금융부문은 향후 6, 7%로 침체될 수도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강해지는 국제압력 = 경제 위기로 은행 구제와 경기부양책에 거액의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조세피난처 문제를 이번 G20의 주요 의제로 다룰 전망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하는 조세피난처의 블랙 리스트에 포함될 것을 우려한 스위스를 포함한 나라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OECD의 블랙 리스트에는 룩셈부르크 케이맨제도 싱가포르 홍콩 등이지만 스위스가 최대 표적이다.

스위스 정부는 '조세 사기'와 '단순 사기'의 구별을 없애고 요구할 경우 모든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다만 각 사례별로 적용하기로 해, 외국인 계좌에 대한 전면적인 정보 공개는 거절할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주의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또 다른 조세피난처인 유럽의 소국 리히텐슈타인의 은행가협회회장인 마이클 라우바는 "금융 위기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며 "더 이상 탈세자금에 의지하는 것은 미래가 없다. 건전한 자금운용 등을 통해 경쟁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배수경 기자 sue687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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