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전원이 나가면 음식이 상하듯, 반도체 공정이 멈추면 웨이퍼도 상한다. 웨이퍼는 반도체의 핵심 원재료다. 손바닥만 한 실리콘 원판 위에 수백억 개의 회로를 새겨 넣는 것이 반도체 제조의 출발점인데, 각 공정 단계 사이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골든타임이 있다. 그 시간을 놓치면 웨이퍼는 공기와 반응해 변질된다. 한 번 망가지면 되돌릴 방법이 없다.


반도체 설비는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는 클린룸 안에서만 작동하는데, 공정이 멈추면 이 정밀한 환경이 무너지고 수천억 원짜리 설비까지 손상된다. 다시 가동하려면 수개월이 걸린다. 반도체 공장이 365일 24시간 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 이 라인이 멈출 위기에 처했다. 삼성전자 노동조합은 오는 5월 21일부터 18일간 총파업을 예고했다.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으로 달라, 성과급 상한선을 없애달라는 것이 요구다. 사측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산라인을 멈춰 세우겠다는 입장이다.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을 대입하면 그 금액은 서울시 연간 예산에 맞먹는다.

삼성전자 노조 투쟁 결의대회, 구호 외치는 조합원들. 연합뉴스

삼성전자 노조 투쟁 결의대회, 구호 외치는 조합원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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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파업이 다른 산업과 다른 이유가 있다. 자동차 공장이 멈추면 공정 중인 차체는 그 상태로 보존된다. 반도체는 멈추는 순간 손실이 즉각적이고 비가역적이다. 노동조합법이 파업 중에도 원료 변질을 막는 보안작업만큼은 반드시 계속돼야 한다고 명시한 것은 이 냉혹한 현실을 법도 외면하지 못한 결과다. 게다가 주요 웨이퍼 제조업체들은 이미 2026년치 물량까지 판매를 마쳤고, 새로 확보하려면 최소 4~5년이 걸린다. 노조 스스로 예고한 손실이 하루 1조 원, 18일이면 18조다. 전문가들이 영구적이고 회복 불가능한 손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 파업을 강행할 만한 명분이 있을까. 파업권은 자본과 정보와 협상력을 독점한 고용주 앞에서 노동자가 대등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법이 보장한 최후의 수단이다. 파업이 역사를 바꿔온 것은 그 절박함에 시민들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삼성전자 노조는 연봉 외에 이미 수억 원의 성과급을 받는 구조에서, 더 받지 못하면 국가 핵심 산업의 라인을 멈추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생산라인을 볼모로 더 많은 몫을 요구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본령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노골적인 욕망의 표출에 가깝다. 최저임금을 두고 싸우는 노동자, 납품 단가를 맞추는 협력사 직원, 퇴직금을 삼성 주식에 넣어둔 평범한 투자자들이 이 장면을 어떤 눈으로 볼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도 없다.

노조의 불안과 불만을 이해해 볼 수는 있다. 반도체 산업은 호황과 불황이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지금 챙기지 않으면 다음 불황엔 기회조차 없다는 조급함, 회사는 잘될 때만 과실을 가져가고 어려울 때는 고통을 전가한다는 불신은 오랜 시간 쌓여온 것이다. 그러나 삼성전자 노조는 현재 과반 조합원을 확보한 교섭력 있는 조직이다. 협상 테이블에서 요구를 관철할 수단이 충분히 있다. 파업은 그 수단을 다 소진했을 때 꺼내드는 최후의 카드인데, 지금은 그 단계가 아니다. 더구나 삼성전자의 생산라인은 한 기업의 자산이 아니다. 수백만 주주와 협력사, 나아가 대한민국 수출의 근간이 걸린 국민경제의 인프라다. 그것을 협상 카드로 삼는 순간, 노사 갈등은 국민 전체를 볼모로 잡는 문제로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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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싸움의 대가는 경영진, 주주뿐 아니라 조합원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시장에서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수십 년간 쌓아온 납기와 품질의 신뢰 덕분이다. 그 신뢰가 흔들리면 고객사는 대안을 찾고, 나눌 파이도 줄어든다. 단기 보상을 극대화하려다 스스로 발판을 허무는 것이다. 보상에 취해 공정을 멈추는 순간, 변질되는 것은 웨이퍼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반도체의 미래도, 그 라인 위에서 일하는 조합원의 내일도 함께 상한다.


박소연 산업부장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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