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골동품' 된 차세대 리더, '골동품' 될 연임 문턱 상향법
2023년 11월, 전 세계 IT 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오픈AI 이사회가 '챗GPT의 아버지'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CEO)를 전격 해임했기 때문이다. 급진적인 인공지능(AI) 개발 노선을 견제하려는, 사외이사를 포함한 이사회의 의지가 작동한 결과였다. 비록 올트먼이 닷새 만에 복귀하며 '5일 천하'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창업자이자 절대적 상징인 CEO라도 이사회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 축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 기념비적 사례가 됐다.
오픈AI 사태가 다시금 회자되는 것은 최근 금융당국이 추진 중인 금융지주 지배구조 개편 논의 때문이다. 실질적인 견제 기구로 작동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 금융권의 사외이사 제도는 사실상 '요식행위'에 그친다는 비판이 매섭다. 특히 '주인 없는 회사'로 불리는 금융지주는 구조적 한계가 뚜렷하다. 회장이 사외이사 선임을 좌우하고, 이들로 구성된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가 다시 회장의 연임을 확정 짓는 '그들만의 리그'가 반복된다.
이사회가 CEO의 감시자가 아닌 '셀프 연임'의 조력자로 전락하면서 6년에서 길게는 9년에 이르는 장기 집권이 일상화됐다. 그 사이 차세대 리더를 위한 후계자 육성 프로그램은 뒷전으로 밀렸다. "6년을 기다리다 보면 차세대 리더도 골동품이 된다"는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의 발언은 그래서 단순한 수사가 아닌 국내 금융권의 뼈아픈 현실을 관통한다. 안정적인 이자 수익 구조에 안주해 혁신보다 안위를 택하는 관행이 금융지주를 거대한 '노후 단지'로 만들고 있다는 경고다.
당국이 내놓은 처방전의 방향성에는 공감한다. 임추위를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하고 의사록 작성과 평가 공시를 강화하는 등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는 정당하다. 문제는 접근 방식의 실효성이다.
개편안의 핵심은 CEO 연임 시 주주총회 '특별결의(출석 주주 3분의 2 이상 찬성)'를 거치도록 법제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간 기업의 CEO 선임 요건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당장 '관치 금융'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실효성도 의문이다. 최근 재선임된 주요 금융지주(우리·BNK·신한) 회장들은 대부분 90% 안팎의 압도적인 찬성률을 기록했다. 요건을 상향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해당 법규 자체가 효력을 잃고 또 하나의 '정책적 골동품'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개편 동력도 예전만 못하다. 3월로 예정됐던 발표는 4월, 5월로 계속 미뤄지고 있다. 이찬진 원장은 지배구조 개편 발표가 늦춰지자 지난주 예정된 금융지주 이사회 의장들과의 간담회를 무기한 연기했다. 실무를 총괄하던 금감원 팀장은 로펌행을 선택해 자리는 수주째 공석이다.
지배구조 개편의 정공법은 명확하다. 경영진에 실질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법적 규제로 연임 문턱을 높이기보다 사외이사가 '거수기'를 벗어나 독립적인 감시 기구로 기능할 수 있도록 평가 시스템을 실질화하고 공시를 강화하는 정책을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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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당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연임을 밀어붙였던 금융지주 회장들과의 싸움에서 당국은 사실상 'KO패'했다. 시장이 수긍하지 못하는 무리한 규제는 당국의 권위만 실추시킬 뿐이다. 사람(리더)을 골동품으로 만들지 않으려다 법안마저 골동품으로 만드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억지스러운 장벽보다는 이사회의 체질을 바꾸는 '느리지만 확실한 변화'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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