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산단 '트래포드'
도로 넓히고 보조금 줘도 못 막은 노후화
풍부한 문화 시설 유치하니 살아난 활기
'산단 관광객' 늘며 지역 GDP 20% 껑충
트래포드 시의장 "산단이 쇼핑·문화 자산"
지난달 15일 방문한 영국 맨체스터의 트래포드 산업단지 내 실내 놀이터 '토탈닌자'. 이날 놀이터를 찾은 조시 앨런군(14)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사진=송승섭 기자 tmdtjq8506@
“지난주에 왔는데 너무 재밌어서 또 왔어요.”
영국 맨체스터의 한 실내 놀이터. 2m 높이의 풍선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 조시 앨런군(14)이 지난달 15일 아시아경제 기자에게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터뷰도 잠시. 함께 온 동생이 커다란 공을 들고 쫓아오자 앨런군은 큰 소리로 “피해야 해요”라고 소리쳤다. 두 형제의 어머니 트레이시 앨런씨는 관광객을 위해 마련된 카페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차로 6시간 떨어진 스코틀랜드 인버네스에서 거주한다고 밝힌 앨런씨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장소인데 아이들이 워낙 좋아하다 보니 지금이 벌써 세 번째 방문”이라고 얘기했다.
지난달 15일 방문한 영국 맨체스터의 트래포드 산업단지 내 실내 놀이터 '토탈닌자'. 방문객들이 각종 시설을 이용하며 놀고 있다. 사진=송승섭 기자 tmdtjq8506@
원본보기 아이콘맨체스터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이 실내 놀이터는 영국 트래포드 산업단지에 있다. 3715㎡(약 1124평)에 달하는 놀이터 내부만 보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시설을 나오는 순간 정문 맞은편에 타이어 판매점이, 오른편에는 유통회사의 물류차량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누가 놀이터 때문에 산업단지를 올까 싶지만 이곳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어른들을 위한 익사이팅 시설까지 있어 평일 평균 방문자는 500여명에 달하고, 주말에는 1000여명이 몰린다. 맨체스터 산단 직원이나 지역주민뿐 아니라 다른 지역 관광객들까지 찾아올 정도다.
특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입소문을 타면서 영국 청년들에게 이색 데이트 장소로 부상했다. 시설 관계자는 “유명 팝스타인 핑크가 딸과 함께 미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인스타그램에 인증숏을 올리면서 20대 유입이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이날도 오전 11시부터 1시간 동안 시설을 이용한 55명 중 42명이 젊은 성인이었다. 맨체스터에 거주하는 아비 잭슨씨(20)는 놀이터를 어떻게 방문했냐는 질문에 “인스타그램에서 알게 됐다”며 “산업단지에 놀기 좋은 시설들이 많다 보니 종종 검색해본다”고 답했다.
트래포드 산단 안팎에는 이 같은 문화·스포츠 시설이 가득 차 있다. 놀이시설에서 차를 타고 동쪽으로 4분만 이동하면 자동차수리점과 안전장비제조업체 사이 ‘실내 카트장’이 있다. 레이싱 카트 50여대와 수십 종의 타이어를 이용해 직접 경주를 즐길 수 있다. 이날 방문한 카트장에서는 이용객 15명이 각자 좋아하는 F1 스포츠팀 유니폼을 입고 레이싱을 즐기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산단 남쪽에는 영국에서 가장 넓은 실내 암벽등반장이 있고, 어린이들을 위한 풍선 테마파크, 대형복합 쇼핑몰, 아쿠아리움, 박물관 등이 있다.
올해 7월 산단 공연장 ‘O2 빅토리아 웨어하우스’에서 열린 락밴드 공연. 이 공연장은 20세기초 한 물류회사가 쓰던 두 개의 창고를 활용해 만들었다. 사진=O2 빅토리아 웨어하우스
원본보기 아이콘이 같은 여가·문화시설은 대부분 기존 산단 건물을 활용해 지었다. 산단 공연장 ‘O2 빅토리아 웨어하우스’가 대표적인 예다. 공연시설은 20세기 초 한 물류회사가 쓰던 두 개의 창고를 고쳐 만들었다. 2012년 음악공연장으로 탈바꿈했는데, 지금은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찾는 장소가 됐다. 관광객을 부르기 위해 유명 가수들을 초빙하면서 지금까지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메인 보컬리스트 토마스 에드워드 요크, 영국 인디가수 샘 펜더, 미국 래퍼 리조가 공연을 펼쳤다. 지난달 27일에는 틱톡에서 유명세를 알린 미국 싱어송라이터 리지 맥알파인의 콘서트가 열렸다.
산단 한쪽에는 피크닉과 산책을 즐길 수 있는 호수와 공원을 조성했다. 별다른 경계표지가 없기 때문에 지역주민과 산단 근로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공원에서 만난 산단 내 공장의 행정직원 데이비드 에스데일씨(61)도 종종 이곳을 찾는다. 그는 “근처 직원들이 점심을 먹거나 주말에는 아이들과 캠핑하는 장소로 인기가 많다”면서 “여기 근로자들은 공원을 하나의 큰 문화시설이자 복지로 여긴다”고 말했다. 다른 문화시설도 이용하냐고 묻자 그는 “근처에 실내카트장이 정말 재밌다”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했다.
트래포드 산단의 문화시설은 수십 년 전 시작된 도시의 쇠락을 막기 위해 마련됐다. 트래포드 산단은 1896년 건설된 세계 최초의 산업전용 부지다. 1970년대까지 성장을 지속했지만 이후 탈산업화 현상으로 급속히 황폐해졌다. 고용도 급격히 위축됐다. 2차대전 말기 트래포드 산단 근로자는 7만5000명에 달했지만 1976년에는 1만5000명으로 줄었다. 미분양 부지까지 속출하자 지방자치단체에서 부랴부랴 보조금을 지급해 도로 확장 등에 나섰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1985년 영국의 환경부, 상공부, 트래포드 의회는 합동으로 ‘산단 재생 연구기금’을 조성했다. 각종 문화시설을 대대적으로 도입하는 ‘트래포드파크 전략’도 수립됐다. 1987년 시행된 전략은 1998년까지 11년간 지속됐다. 문화시설 확충뿐 아니라 공공 설치예술과 랜드마크도 들어섰다. 복합 엔터테인먼트 단지인 ‘트래포드 센터’도 이 무렵 지어졌다. 이 기간 트래포드 산단은 990개 기업을 유치했고, 2만9000개의 신규 일자리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17억파운드(약 3조599억원)에 달하는 민간투자도 끌어냈다.
트래포드 산단의 문화확충 전략은 현재진행형이다. 관광객 등 산단 유동인구가 꾸준히 늘면서 최근 5년 사이 지역총생산이 19%가량 증가했기 때문이다. 톰 로스 트래포드 시의회 의장은 “트래포드 산단은 여전히 산업과 고용의 중심지이지만 동시에 쇼핑몰과 문화자산을 중심으로 관광분야에서까지 큰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조만간 지어지는 스파와 리조트 시설이 관광객을 더 끌어들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로스 의장은 “산단의 전통적인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생각하면 주요 도시의 산업지역이 방치되는 것을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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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맨체스터=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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