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납품단가 연동제는 을(乙)끼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갑질’은 영어로 ‘high-handedness’(고압적인 행태), ‘abuse of power’(권력남용)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과거 대한항공의 ‘땅콩회항’을 두고 해외 언론에선 갑질을 ‘gabjil’이라고도 썼다. 마땅한 표현이 없었기 때문이다.
갑과 을에는 본래 아무 뜻이 없다. 그래서 갑남을녀(甲男乙女)는 평범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실재하는 뜻은 다르다. 법률 계약서상 갑과 을은 계약 당사자일 뿐이지만 한국에서 갑을관계는 위아래, 권력을 가진 자와 복종하는 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의미하기도 한다.
최근 시범 운영에 들어간 납품단가 연동제는 갑을관계에 변화를 일으킬 일대 사건이다. 그동안 무수한 을들이 도입을 갈망했던 것이기도 하다.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최근 어렵게나마 첫발을 뗄 수 있었던 건 글로벌 공급망 위기와 인플레이션으로 작년부터 원자재 가격이 폭등한 상황 덕이다. 중소기업들에 위기 상황이 구조적 모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을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갑을관계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사건은 9년 전에도 있었다. 남양유업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욕설과 폭언을 퍼붓는 녹음파일이 2013년 당시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대리점에 대한 본사의 물량 떠넘기기는 공공연히 있었는데 도가 지나치자 곪아 터졌다.
기업은 물론 지방자치단체까지 수십 년 관행을 바꾸려는 계기가 됐다. 기업들은 앞다퉈 계약서부터 뜯어고쳤다. 갑을이란 표현 대신 쌍방의 이름을 넣거나 파트너사 등 다른 표현을 찾아 썼다. 서울시도 모든 문서에서 갑을 용어를 퇴출하고, 갑을관계 혁신 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선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카오스 이론이 나비효과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납품단가 연동제를 공약하게 된 것은 원자재값 폭등으로 을들의 고통이 날고 커지는 상황이 계속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매년 불공정거래 피해 실태를 조사하는데 최근 조사에서 불공정거래로 피해를 봤다는 기업은 조사 대상의 36.4%나 됐다. 이 중 열에 여섯은 납품대금 관련(후려치기, 미지급, 감액 등) 피해였다. 부당계약 관련(계약서 미발급, 부당특약, 전속거래 등), 일방적인 계약중단 피해 호소도 상당했다.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일수록 대처에 어려움을 겪었고 고스란히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런 문제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만 생기는 건 아니다. 국가통계로 활용하는 중소벤처기업부의 중소기업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국내 중소기업 중 대기업과 거래하는 기업의 비중은 30% 정도고, 중소기업 간의 거래는 55% 안팎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나머지 15%는 일반소비자와 공공기관이 거래 대상이다.
납품단가 연동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통계는 말하고 있다. 단일 거래 규모나 파급효과, 사회적 관심 등으로 볼 때 납품단가 연동제의 확대와 법제화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 선행되고, 모범사례가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대기업에는 을인 중소기업이 다른 중소기업엔 갑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이런 중소기업들도 예외일 수는 없으니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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