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 변화와 헌재의 다양성 중요해져

[법쏘시개] 재판소원 이후의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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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판결문을 잘 쓰는 판사는 고수, 형법 판결문을 잘 쓰는 판사는 중수, 판결문에 헌법을 가져오는 판사는 요주의인물…'


한 법조인이 기자에게 한 말이다. 민법은 정교하고 다루기 어려운 '작은 칼'이라 이를 정밀하게 쥐고 휘두르는 능력이 곧 법관 세계에서 진짜 실력으로 평가받는다는 뜻이었다. 헌법은 '크고 둔중한 칼'이어서 헌법 조문을 법원 판결문에 꺼내 드는 판사는 자칫 정치적 성향이 있는 판사나 이른바 '관심 종자'로 오해받는다고 했다.

실제 일선 법원의 판결문에는 헌법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위헌법률심판이라는 별개 절차가 있는 데다, 헌법의 최종 해석 권한은 헌법재판소에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위 법률이 헌법에 합치한다는 전제하에 대법원 판례 중심으로 재판을 이끄는 것이 법원의 관례기도 하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판결이란 구체적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법률 해석을 내리는 작업인데, 여기에 헌법을 끌어오면 판단의 스케일이 개별 사안에 맞지 않게 커진다"고 했다. 재판 지연으로 쌓인 사건을 처리하기에도 벅찬 판사들에게 헌법적 검토는 월권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재판소원은 새로운 변곡점을 만들고 있다. 한 헌법전문가는 "재판소원 도입으로 판사 모두가 헌법을 신경 쓰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했다. 확정판결이 사후적으로 헌재에서 뒤집히는 낭패를 막기 위해, 판사들이 1~3심 단계에서부터 선제적으로 기본권 등 헌법과의 합치성을 꼼꼼히 따져볼 것이라는 관측이다.

실제 그런 전향적인 시도가 일어난 적도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12월 '꼬마빌딩 감정평가' 관련 상속증여세법 시행령에 대해 "헌법에 위배돼 무효"라고 판단했다. 위법과 함께 위을 직접 적시한 이 판결은 법조계 안팎에서 이례적인 결정으로 회자됐다. 여기에 더해 헌재가 녹십자의 '백신 입찰 담합 의혹' 사건을 재판소원 1호 사건으로 지정했다고 하니, 헌재와 대법원간의 건강한 긴장과 견제도 기대되고 있다. 1~3심부터 폭넓게 기본권에 대해 사유하는 접근이 안착된다면 이 역시 긍정적이다.


관건은 이런 변화의 신호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주체들이다. 제도가 열려도 이를 다루는 법원과 헌재 간에 건강한 견제보다는 암묵적 수렴이 일어날 가능성이 제기된다. 헌법재판관과 대법관의 인적 구성 자체가 동질적이어서다. 현재 헌법재판관은 진보 성향 재판관 4명(김상환·오영준·정계선·마은혁), 보수 3명(정형식·조한창·김복형), 중도 2명(김형두·정정미)으로 나뉘지만, 변호사를 잠깐 거쳤던 조한창 재판관을 포함해 9인이 전원이 판사 출신이다. 막중한 권한을 쥔 두 기관이 특정 직역 출신으로만 채워져 있어 사법의 다양성과 대표성 측면에서 꾸준히 한계가 지적돼 왔다. 같은 조직 문화 속에서 평생 경력을 쌓아온 이들끼리만 판단을 독점할 경우, 다양한 사회적 시각을 담아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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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판결문에 헌법을 끌어오는 일은 아직까지 제도가 안착시킨 영역이라기보다는 법관 개인의 치열한 고민과 결단에 기댈 수밖에 없다. 재판소원이 진정한 사법 발전의 불쏘시개가 되려면 제도를 운용하는 인적 구성부터 달라져야 한다. 헌법재판관 인선에서 법관 출신 일변도의 관행을 깨고 검사, 재야 변호사, 헌법학자 등으로 배경을 대폭 다양화해 두 기관 간의 건강한 이질성을 확보하는 논의가 시급하다. 그 전까지는 판결문에 헌법을 담아내는 용기 있는 선택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례적'이라는 꼬리표를 떼기 어려울 것이다.


구채은 법조팀장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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