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관 감독 '조제'

[이종길의 영화읽기]평범해진 '조제', 흐릿해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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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에서 구미코(이케와키 치즈루)는 조제로 불리길 원한다. 조제는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사랑의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그 위약하고 무상한 본질을 꿰뚫어 본다. "일 년 후 혹은 두 달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의 말대로 밀물처럼 들이닥친 사랑은 소리 없이 썰물이 되어 빠져 나간다. 베르나르는 좌절한다. "조제, 이건 말이 안 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조제는 상냥하게 대답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구미코도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에게 자기를 조제라고 소개한다. 그들의 사랑이 허무하게 끝날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냉소적 태도는 불우한 유년 시절과 하반신 장애에서 비롯된다. 조제는 츠네오를 만나기 전까지 바깥 세상과 격리돼 지냈다. 할머니의 우려가 있었다. "이런 손주가 있다고 나쁜 짓을 당할까봐…. 될 수 있으면 눈에 안 띄게 다니려다 보니 이른 아침 산책을 하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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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도 감독은 조제의 고립된 분위기를 전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첫 장면에서 마작을 즐기는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가 사람들 몰래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긴다. 돌발적인 사고로 츠네오를 마주한 구미코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자기를 해칠까봐 식칼도 휘두른다. 할머니가 츠네오에게 밥 먹고 가라고 할 때까지 입을 꾹 다문다.


교류하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은 계란말이를 계기로 소통한다. 츠네오의 맛있다는 칭찬에 당연하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내가 만들었는데, 맛없으면 이상하지. 그런데 나중에 배 아플지도 몰라. 달걀 껍데기에 닭똥이 묻어 있었어. 살모넬라. 식중독의 40%는 살모넬라균이 원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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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네오는 싱긋 웃으며 맛있게 밥을 먹는다. 대학 근처에서 자취하며 집밥이 그리웠던 터였다. 허기가 사라지면서 인스턴트식 사랑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그는 바람둥이였다. 애인이 아닌 여성과도 잠자리를 같이했다. 츠네오는 구미코와 만나며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다. 그래서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깊은 슬픔에 잠긴다. 만남을 계속 이어갈 자신이 없는 자기를 자책하고 원망한다.


김종관 감독이 리메이크한 '조제'에서 조제(한지민)와 영석(남주혁)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번데기탕과 스팸 구이다. 영석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이를 지켜보던 조제가 퉁명스럽게 묻는다. "왜 그렇게 먹어? 독이라도 타 놨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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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는 구미코보다 활달하고 외향적이다. 집에 갇혀 지내지도 않았다. 책 사러 가다 휠체어 바퀴 고장으로 사고를 당한다. 그는 영석을 보고 주저 없이 말한다. 리어카를 가리키며 "나 좀 저기 태워줘"라고 부탁한다. 집에 도착해서도 "밥 먹고 가요, 학생"이라며 친절을 베푼다. 카메라는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지민 또한 옷을 몇 겹으로 꽁꽁 싸매고 있다. 조제의 성격은 물론 만남의 의미까지 모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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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의 조제는 '한 달 후, 일 년 후'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조제처럼 사랑의 본질을 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렵게 찾아온 사랑이 떠나가지 않기를 소망한다. 허무한 삶으로 돌아가길 두려워한다. 호랑이(성장)와 물고기(일상)의 재해석마저 설득력이 부족해 평범한 배역으로 전락해버렸다. 아픈 경험이 시간이 흘러 삶의 새로운 동력이 됐다는 결말 또한 다르지 않다. 조제는 이미 세상 밖에 나와 있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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