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 '촬영감독이 묻고 촬영감독이 답하다 2'

영화 '남한산성' 스틸 컷

영화 '남한산성'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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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꽁꽁 얼어붙었다. 어지러이 흩날리는 눈발. 김상헌(김윤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늙은 사공(문창길)이 등빙(登氷)을 돕는다.


"소인이 얼음길을 잘 아는지라 청나라 군사들이 들어오면 길을 안내해 주고 곡식이라도 좀 얻어 볼까 합니다."

"그대는 조선의 백성이오. 어찌하여 어제는 임금을 건네주고, 내일은 청의 군사를 건네주려는 것이오?"

"소인, 어제 어가를 건네주고 나서 좁쌀 한 줌 받지 못했습니다."

이어지는 긴 적막. 세찬 바람 소리만 귓전을 스친다. 스크린마저 차갑다. 꽁꽁 언 얼음장, 눈보라가 치는 겨울 들판, 찬 바람에 흔들리는 겨울 산의 나목. 하나같이 광활하게 나타난다. 카메라가 얼어붙은 강바닥에서 넓은 각도로 포착했다.


황동혁 감독이 연출한 영화 '남한산성(2017)'은 싸늘하게 시작한다. 김상헌은 늙은 사공에게 남한산성으로 함께 가자고 요청한다. 청의 군사들이 남한산성까지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서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다루는 이야기다. 인조(박해일)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 고립된 47일의 비극을 그린다. 늙은 사공에게 이들의 싸움은 중요하지 않다. 먹고 살 게 더 큰 걱정거리다.

"소인은 소인이 살던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요."


김상헌이 검을 빼든다. 돌아보는 늙은 사공을 주저없이 벤다. 잔혹한 장면은 엄동설한의 풍경과 어우러져 정적으로 나타난다. 김상헌이 다시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장면까지 고요함을 유지한다. 늙은 사공의 피가 눈길에 퍼지는 모습을 부감(높은 위치에서 피사체를 내려다보며 촬영)으로 잡았다. 백의민족에게 다가올 사달을 예고한다.


[이종길의 가을귀]새하얀 입김도 주인공으로 만드는 스크린 뒤 마법사 원본보기 아이콘


원작자 김훈은 이 신에 대해 "뜨겁고 격정적인 것들을 냉엄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살아 있다"고 평했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얼어붙은 산하를 보여준다. 그 죽음과 죽임이 조국의 산천에서 벌어지는 비극이라는 것을 냉정하게 가리킨다."


김훈이 소설에서 의도한 바를 영상으로 표현한 이는 김지용 촬영감독이다. 김지용은 이 작품으로 세계 유일의 촬영감독 대상 영화제인 '에너가 카메리마주 그랑프리(Energa Camerimage Grand Prix)'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황금개구리상(Golden Frog)을 받았다.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의 논쟁을 뜨겁게 그려내고 민초들의 삶을 차분하게 조명해 꿈도 희망도 없던 시대의 공기가 실감나게 전달했다고 평가받았다.


김지용의 가시적 성과는 국내에서 크게 조명되지 않았다. 언론이나 평단의 시선이 주로 배우 혹은 감독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촬영감독, 미술감독 등 주요 스태프를 창작자보다 기술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촬영감독에게는 카메라 앵글을 잡고 빛을 조절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역할이 있다. 카메라로 배우의 감정을 잘 포착하려면 촬영감독 역시 배우가 돼야 한다. 상대역이 돼 감정호흡을 잘 맞춰야 자연스러운 연기를 얻을 수 있다. 카메라 앵글을 잡을 때는 컷의 전후 편집까지 고려해야 한다. 영화 전체의 리듬을 생각하며 위치와 렌즈를 선택해야 한다.


촬영감독은 시나리오 안에서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이야기를 이미지로 구현하는 스토리텔러이기도 하다. 연출자만큼 영화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넓은 통찰을 구해야 한다.


[이종길의 가을귀]새하얀 입김도 주인공으로 만드는 스크린 뒤 마법사 원본보기 아이콘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이 펴낸 '촬영감독이 묻고 촬영감독이 답하다 2'는 촬영감독의 다양한 역할에 대해 알 수 있는 인터뷰집이다. 충무로의 대표 촬영감독들이 어떻게 영화를 준비하고 만들었는지 세세하게 들려준다. '남한산성'의 김지용을 비롯해 '1987(2017)'의 김우형,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6)'의 조형래, '꿈의 제인(2016)'의 조영직, '악녀(2017)'의 박정훈, '택시운전사(2017)'의 고락선, '범죄도시(2017)'의 주성림 등이다.


김지용이 콘티(영화 촬영을 위해 각본을 바탕으로 필요한 모든 사항을 기록한 것) 작업에서 구상한 '남한산성' 도입부의 핵심은 김상헌과 늙은 사공이 꽁꽁 언 강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는 배우들이 해를 등지게끔 만들었다. 불안한 기운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잔뜩 흐린 하늘에 눈발이 날리는 장면을 바랐는데, 안타깝게도 최명길과 김상헌의 첫 장면 모두 날씨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워낙 넓은 공간인데다가 실제로 빙판 위라서 자연광을 조절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준비할 때부터 날이 맑을 경우에는 역광으로 찍을 수 있게끔 촬영 순서를 잡아두었다."


김지용은 추위를 부각하기 위해 크게 두 색조를 고수했다. 한낮에도 느껴지는 금속성의 차가운 톤과 호롱불 같이 과거 사용했을 법한 광원들로 대변되는 오렌지빛의 따뜻한 톤이다. 전자는 자연광과 의상이 가진 거친 질감, 배우들이 내는 하얀 입김 등과 효과적으로 어우러져 사실적인 느낌까지 전한다.


"실제 한겨울에 추운 장소에서 촬영하니 대부분의 경우 자연스레 나왔다. 촬영감독의 역할은 그것이 잘 보이게끔 조명의 방향을 적절히 설정해주는 것이었다. 코와 입술 주위 수염에 입김으로 인해 서리가 앉은 듯한 느낌의 분장을 더하니 정말 추워 보였다."


[이종길의 가을귀]새하얀 입김도 주인공으로 만드는 스크린 뒤 마법사 원본보기 아이콘


철저한 사전 계획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대한 자연광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뒤 카메라 위치, 렌즈 선택은 물론 배우들 동선까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자연광을 쓰는 것은 조명을 사용하지 않는 것과 다른 개념이다. 카메라에 실제처럼 담길 수 있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연광을 찍고 싶을 때는 일단 스케줄링(작업들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태양은 기다려주는 법이 없이 쉬지 않고 움직이니까. 촬영할 때 나는 준비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경우가(혹은 반대거나) 많지 않나. 내가 원하는 샷을 찍고 싶은 시간에 다 같이 준비되어 있을 수 있도록 전체 프로덕션을 유도해내야 한다. 그리고 흐린 날의 산광(사방으로 흩어지거나 방향이 일정하지 않은 빛)이라 해도 검은 천 등을 이용해서 콘트라스트를 조절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거다. 네거티브 필(보조 빛 차단)을 하거나, 산광을 최대한 끊어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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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은 인간의 방황과 고뇌로 가득하다. 무기력한 인조와 짓밟히고 뭉개지는 민초, 옥신각신하는 신하들이 시종일관 무겁고 비장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패배와 치욕 속에서 희미하게 돋아나는 희망의 싹이 더 절실하게 부각된다. 그야말로 문장이 관념에서 실존으로 변하며 생기는 마법 같은 효과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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