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당신, 좀 아프면 안 되나요?/유지소
나는 기침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일요일엔 팝콘을 먹으며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극장에서 기침을 하고 금요일엔 꽃등심을 뒤집으며 은빛 굴뚝이 아름다운 식당에서 기침을 하고 월요일 아침엔 잠이 덜 깬 아기와 두 손에 물이 묻은 아내의 볼에 뽀뽀를 하며 기침을 하고. 한 사람이 기침을 하면 두 사람이 기침을 하고 두 사람이 기침을 하면 네 사람이 기침을 하고 하루 또 하루 다음엔 백 송이 장미로 꽃다발을 만들던 사람이 기침을 하고 하루 또 하루 다음엔 연분홍 장미로 생크림 케이크를 장식하던 사람이 기침을 하고 하루 또 하루 다음엔 죽은 사람에게 삼베옷을 입히던 사람이 죽을 듯이 기침을 하고. 누가 뭐래도 나는 기침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하지에서 하지까지 하지감자를 먹으며 기침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동지에서 동지까지 동지팥죽을 먹으며 기침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서울에서 기침하는 사람이 고속 열차를 타고 내려와 해운대 바닷물에 기침을 풀어놓고 모스크바에서 기침하는 사람이 여객선을 타고 내려와 중앙동 중앙역에 기침을 풀어놓고. 지하철에도 기침하는 사람이 있고 백화점에도 기침하는 사람이 있고 도서관에도 기침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충분할까요? 나의 미래는 흙이 묻은 당근 하나와 작은 앵무새 한 마리로 충분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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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고서 김수영 시인이 쓴 「눈」의 한 구절 즉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를 떠올리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약간 긴 산문시이긴 해도 "기침"이라는 단어가 무려 스물한 번이나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시를 쭈욱 읽다 보면 왠지 모르게 "기침하는" 행위가 유지소 시인의 말처럼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김수영 시인의 「눈」의 주된 맥락은 사실 "기침을 하자"보다는 "마음껏 뱉자"에 집약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음껏"이라는 단어에는 김수영 시인이 살았던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민주주의를 향한 시인의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다. 이에 비해 이 시에서는 도처마다 기침 소리가 들리지만 그것은 다만 "흙이 묻은 당근 하나와 작은 앵무새 한 마리"만큼이나 미미하고 사소해 보인다. 그래서, 그리고 특히 제목을 염두에 두자면, 이 시의 배면 다른 한편에 이성복 시인이 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그날」의 한 문장을 두고 싶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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