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작곡가, 30년 가까이 고향 땅 밟지 못하게 한 사건의 진실은
[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 '디아스포라'는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역사는 수많은 한국인들도 디아스포라로 살게 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1917~1995)도 있었다. 그는 한 사건에 연루된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가까이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지난 17일은 작곡가 윤이상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독일에서 활동하며 베를린 음대 교수를 역임했고,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축하행사로 무대에 올린 오페라 '심청'이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유럽 평론가들은 '20세기 중요 작곡가 56인' 중 한 명으로 그를 꼽았다. 생전 '유럽에서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1995년 독일 방송은 그를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으로 뽑았다.
동백림 사건으로 두 명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윤이상은 1심 무기징역, 2심 징역 15년, 최종 징역 10년이 확정됐다. 하지만 윤이상은 2년 뒤 극적으로 특사로 풀려날 수 있었다. 국제사회의 싸늘한 시선 때문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서독과 프랑스 등에서 관련자들을 납치하다시피 연행하면서 국제법을 어겼고 이는 심각한 외교문제가 됐다. 서독 정부는 한국 수사관의 자국 내 체포 활동을 주권 침해로 규정하고 공식 항의하면서 관련자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서독은 이후 재판 후 특별사면을 요구했는데 중형이 선고되자 한국에 대한 차관 승인까지 보류했다고 한다.
또 이 사건은 세계적인 저명 예술인들을 무리하게 체포하면서 한국이 인권후진국으로 인식되게 했다. 세계의 눈이 재판 과정을 들여다봤고 혐의와 법 적용이 터무니없다는 것이 알려졌다. 결국 재판을 주시하고 있던 서방 국가들의 압력에 못 이겨 윤이상은 풀려날 수 있었다. 2년의 옥고를 치른 뒤 국외로 추방된 윤이상은 71년 독일 국적을 취득했고 이후에는 입국이 금지돼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그는 줄기차게 고국 방문을 원했지만 정부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995년 베를린에서 디아스포라로 생을 마쳤다. 그는 독일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이 사건은 2007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조사를 거쳐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규모 간첩사건으로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 과장한 것으로 밝혀졌고 정부는 관련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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