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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서의 On Stage]미로에 선 탈북녀…이념과 현실 사이, 갈 곳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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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인문극장 연극 '목란언니'

평생 음악가로 살고팠던 '평양 엘리트'의 탈북, 그러나…
남한에서 만난 악연에 북도 남도 아닌 제3의 곳으로 떠밀리는데
잊고있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는 무대


두산인문극장 '목란언니' 공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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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녀성은 꽃이라네/ 생활의 꽃이라네/ 한가정 알뜰살뜰/ 돌보는 꽃이라네/ 정다운 아내여 누나여/ 그대들 없다면/ 생활의 한자리가/ 비어 있으리/ 녀성은 꽃이라네/ 생활의 꽃이라네.'
연극 '목란언니(연출 전인철)'에 등장하는 북한 노랫말이다. 탈북녀 조목란과 남한 여자 조대자의 비극적 삶이 구슬픈 음율을 따라 무대 위에서 교차한다. 두산아트센터 창작자 육성 프로그램 아티스트인 김은성이 집필한 목란언니는 2011년 낭독공연으로 선보인 뒤 이듬해 두산아트센터 '경계인 시리즈'로 정식 소개됐다.

'작가노트'에서 김은성은 "북에서 온 목란이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했다. 이 물음은 "북에서, 중국에서, 동남아에서, 살 곳을 찾아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과 우리는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로 확장된다. 하지만 작가는 답을 찾다 끝내 미로 안에 갇힌 듯 "어떻게 해야 함께 잘 살 수 있을까?"라고 혼잣말처럼 되뇔 뿐이다.

목란언니는 음악가 조목란이 남한에 정착하려다 실망과 좌절을 겪으며 다시 고향으로 떠나는 과정을 그린다. 화가인 아버지와 무용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목란은 평생 음악가로 살고자 했던 '평양 엘리트'다. 그러던 어느 날 온 가족이 정치범으로 몰리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녀는 훗날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온다. 하지만 북에 있는 부모를 서울로 데려와 준다는 브로커에게 속아 정착금과 임대아파트 보증금까지 사기를 당한 그는 남한에서의 삶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두산인문극장 '목란언니' 공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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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란이 남한에서 만난 다양한 인물들 중 룸살롱 사장이자 포주인 조대자와의 악연은 그녀를 점점 황폐화시키고 파멸의 나락으로 이끈다. 술 팔고 몸 팔아 사업을 일구고 자식들을 키워온 조대자는 한국의 뼈아픈 근현대사를 내포하고 있는 강철 같은 여성이다. 그의 남편은 경제개발 시절 중동 사우디아라비아로 노동하러 갔다가 젊은 나이에 객사했다. 남편의 유일한 유품인 커다란 망치는 일제시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시아버지의 유품이기도 하다. 망치(비극)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 뿐 해소되지 않는다.

조목란과 조대자. 공교롭게 성이 같은 두 여성의 삶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즉 삶을 이끄는 견인차인 동시에 희생을 요구하는 운명의 수레바퀴 안에서 벌어진다는 점에서 '여성성(딸ㆍ엄마)'의 비극을 드러낸다.

마름모꼴의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네 개로 분할된 벽면 한 쪽에서 등을 돌린 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목란의 아버지 조선호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자 그녀를 끊임없이 북으로 끌어당기는 존재다. 조대자의 2남1녀 역시 삶의 구원인 동시에 벗어던질 수 없는 굴레다. 장남 허태산은 한국사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나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해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차남 허태강은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나 대학 구조조정으로 철학과가 없어지면서 삶에 회의를 느끼는 인물이다. 막내 딸 허태양은 소설가이지만 소설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시나리오를 쓰고 대필 아르바이트를 한다.

두산인문극장 '목란언니' 공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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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란이 재입북 자금을 벌기 위해 태산의 간병인으로 취직하면서 각자의 운명은 숨 가쁘게 전개된다. 태산은 목란의 노래와 아코디언 연주를 들으며 점차 생기를 회복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이를 본 조대자는 아들과 목란을 짝지어주려 한다. 그러나 목란을 사랑하게 된 차남 태강은 조대자가 도망가며 비상금으로 맡긴 5000만원을 들고 그녀와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다. 5000만원은 목란이 북한으로 돌아가기 위해 브로커에게 줘야 하는 액수와 같다.

목란은 어디로 갔을까. 이런 궁금증이 들 찰나 중국어로 된 '사랑의 미로'가 울려 퍼지며 막이 내린다. 희망(가족이 있는 북한)을 찾아 다시 모험을 감행했지만 끝내 목란이 도착한 곳은 중국 뒷골목 홍등가. 행복을 찾아 떠났는데 떠나온 그 거리만큼 더 멀어진 황량한 공간에 목란이 서 있다. 희망이 남아 있는 걸까.

두산인문극장 '목란언니' 공연 모습.

두산인문극장 '목란언니' 공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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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전인철은 지난 4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에게 관심 없는 남한의 현실은 냉혹하다"면서 "아마도 남에 있는 우리들이 행복하지 않아서일 것"이라고 했다. 초연 당시 극 중심으로 연극적 비극을 연출했다면 이번 공연에는 지금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지점을 드러냈다고 한다. 목란이 갖는 상징성에 대해서는 "목란은 이념, 체제를 넘어 우리가 잃어버리고, 잊고 지내던 고귀한 존재로 병들어 있는 우리들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의미"라고 해설했다

조목란 역은 김정민이, 조대자 역은 강지은이 맡는다. 이 외에 유병훈, 조영규, 김주완, 안병식, 백성철, 이지혜, 김민하, 하현지, 김벼리, 감소현, 이주연이 출연한다. 목란언니는 두산아트센터 인문기획 프로그램 '2017 두산인문극장' 두 번째 공연작으로 오는 2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상연한다. 두산인문극장은 올해 '갈등'을 주제로 오는 6월까지 강연 열 편과 공연 네 편, 전시 한 편, 영화 세 편을 마련했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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