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허진석의 책과 저자] 왜 지금 대한민국에서 들뢰즈인가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원본보기 아이콘
미셸 푸코가 말한다. "아마도 어느 날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라고 불릴 것이다." 질 들뢰즈가 말한다.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웃게 만들고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격노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지닌 농담이다." 지(知)의 대지에 우뚝 선 두 천재의 짧은 일기토는 번개처럼 찰나를 수놓고 영겁 속으로 사라진다. 번개. 철학자 서동욱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플라톤이라면 번개가 나타나기 위해 먼저 번개의 정체성(동일성)에 관한 개념(이데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리라. 이데아는 현상 세계 너머에 탁월한 형태로 있으며, 이데아를 분유(分有)받은 현상계의 번개는 이데아보다 열등하다. 그러나 들뢰즈에게는 번개의 동일성(이데아)보다 '차이'가 먼저다. 빛과 어둠의 '차이'에서 나온 결과물이 하나의 정체성을 지닌 조형물(번개)이다. 조형물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이데아가 우선하지 않는다.
차이는 서로 차이 나는 항들을 그 자체로 긍정할 뿐 극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헤겔식 변증법에서는 부정성이 항들을 관계 맺어 종합된 새로운 항으로 발전하게 해준다. 반면 차이의 세계에서는 차이 나는 것들이 부정되지 않고, 그 자체로 '반복'되면서 사물들을 생산한다. 음악, 무용, 시의 선율이나 후렴구를 떠올려 보라. 반복은 '되풀이 되는 시간'이며, 주어진 상태들의 긍정을 조건으로 한다.

조금 어려운가? 그럴까봐 서동욱은 시인 김경주를 인용한다. 시인은 말한다. "어린 시절 목욕탕에 다녀오던 길에 아버지가 불던 휘파람이 신기했다. 언젠가 타이의 시골 화장실에서 휘파람을 불다가 이국의 골목에서 그 옛날 아버지가 분 휘파람을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휘파람을 만나고도 못 알아보면 너무 억울해 울 것 같았다." 보라, 반복은 과거의 시간에 뒤늦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만든다.

들뢰즈는 1968년에 쓴 '차이와 반복'을 통해 우리에게 전통 철학의 지평선을 옮겨 놓는 낯선 즐거움을 선물했다. 이 한 권 만으로도 들뢰즈에 대한 푸코의 신원보증은 유효하다. 그러나 그는 1972년 정신분석학자 가타리와 함께 '안티오이디푸스'를 낸다. 이 책에서 주요한 개념은 '욕망'이다. 프로이트가 정의한 '무의식'과 '욕망' 개념에서 벗어나 니체적 입장에서 그 개념들과 '기계', '부분대상' 등을 재정의하고 분열-분석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68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들, 사람들이 그토록 강렬하게 욕망을 분출했는데 왜 금세 보수화해 버렸는가 하는 문제들을 성찰한다. "인민은 왜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을 '위해' 투쟁하는가?" 물리적 억압을 동원하는 장치들은 자발적 예속 없이 작동할 수 없다. 그렇기에 푸코는 서문에서 "어떻게 해야 우리는 말과 행동에서, 심장과 쾌락에서 파시즘을 떨쳐 낼까? 우리의 행동 속에 배어 있는 파시즘을 어떻게 해야 색출해 낼까?"라고 묻는다.

계간파란 2016년 가을호 '들뢰즈'

계간파란 2016년 가을호 '들뢰즈'

원본보기 아이콘
'차이와 반복', '안티오이디푸스' 두 권만 읽어도 들뢰즈에 대해 아는 척을 꽤 할 수 있다. 포털에서 서동욱과 같은 깊이 있는 학자들이 쉽게 풀어 둔 들뢰즈론을 읽을 수도 있다. 서점에는 들뢰즈의 철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안내하는 책들이 여럿 꽂혀 있다. 그런데 시 중심의 문학 계간지 '파란'은 가을호 주제로 들뢰즈를 선택하고 젊은 필자 열 명을 동원해 336쪽짜리 특집을 실었다. 뒤표지에 이런 문장을 인쇄했다. '문제는 무의식의 생산이다.'

'파란'의 기획위원들은 권두언을 통해 묻는다. '왜 들뢰즈인가?' 그리고 썼다. "국가가 국민의 권리를 심연으로 밀어 넣고 자본이 국민의 삶을 상시적으로 겁탈하는 상황 하에서,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건 국가와 권력이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도착적 쾌를 즐기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욕망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여기에 터 잡은 우리의 주체성이 새로운 '판'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huhball@

계간파란 2016년 가을호 '들뢰즈' / 파란 / 1만5000원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하이브-민희진 갈등에도…'컴백' 뉴진스 새 앨범 재킷 공개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국내이슈

  •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신형 GV70 내달 출시…부분변경 디자인 공개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