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라면 번개가 나타나기 위해 먼저 번개의 정체성(동일성)에 관한 개념(이데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리라. 이데아는 현상 세계 너머에 탁월한 형태로 있으며, 이데아를 분유(分有)받은 현상계의 번개는 이데아보다 열등하다. 그러나 들뢰즈에게는 번개의 동일성(이데아)보다 '차이'가 먼저다. 빛과 어둠의 '차이'에서 나온 결과물이 하나의 정체성을 지닌 조형물(번개)이다. 조형물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이데아가 우선하지 않는다.
조금 어려운가? 그럴까봐 서동욱은 시인 김경주를 인용한다. 시인은 말한다. "어린 시절 목욕탕에 다녀오던 길에 아버지가 불던 휘파람이 신기했다. 언젠가 타이의 시골 화장실에서 휘파람을 불다가 이국의 골목에서 그 옛날 아버지가 분 휘파람을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휘파람을 만나고도 못 알아보면 너무 억울해 울 것 같았다." 보라, 반복은 과거의 시간에 뒤늦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만든다.
들뢰즈는 1968년에 쓴 '차이와 반복'을 통해 우리에게 전통 철학의 지평선을 옮겨 놓는 낯선 즐거움을 선물했다. 이 한 권 만으로도 들뢰즈에 대한 푸코의 신원보증은 유효하다. 그러나 그는 1972년 정신분석학자 가타리와 함께 '안티오이디푸스'를 낸다. 이 책에서 주요한 개념은 '욕망'이다. 프로이트가 정의한 '무의식'과 '욕망' 개념에서 벗어나 니체적 입장에서 그 개념들과 '기계', '부분대상' 등을 재정의하고 분열-분석한다.
'차이와 반복', '안티오이디푸스' 두 권만 읽어도 들뢰즈에 대해 아는 척을 꽤 할 수 있다. 포털에서 서동욱과 같은 깊이 있는 학자들이 쉽게 풀어 둔 들뢰즈론을 읽을 수도 있다. 서점에는 들뢰즈의 철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안내하는 책들이 여럿 꽂혀 있다. 그런데 시 중심의 문학 계간지 '파란'은 가을호 주제로 들뢰즈를 선택하고 젊은 필자 열 명을 동원해 336쪽짜리 특집을 실었다. 뒤표지에 이런 문장을 인쇄했다. '문제는 무의식의 생산이다.'
'파란'의 기획위원들은 권두언을 통해 묻는다. '왜 들뢰즈인가?' 그리고 썼다. "국가가 국민의 권리를 심연으로 밀어 넣고 자본이 국민의 삶을 상시적으로 겁탈하는 상황 하에서,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건 국가와 권력이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도착적 쾌를 즐기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욕망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여기에 터 잡은 우리의 주체성이 새로운 '판'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huhball@
계간파란 2016년 가을호 '들뢰즈' / 파란 / 1만5000원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