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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인생 60년 이순재 "NG 5번 내면 관둬야지"

최종수정 2016.12.02 13:02 기사입력 2016.12.02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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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융성이 문화말살이 돼버렸지만,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헤쳐나가자" 후배들에게 당부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60주년 기념 무대에 서는 배우 이순재.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60주년 기념 무대에 서는 배우 이순재.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지난 달 28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연습실 한 구석에 앉아있던 배우 이순재(81)가 이내 혼잣말로 대사 연습을 시작했다. TV에서 듣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다. 이따금 종이컵으로 목을 축였다. 시연을 보기 위해 취재진이 하나둘 몰려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대사 암기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고 했다. "현장에서 엔지(NG)를 다섯 번 이상 내면 관둬야지"하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580마디의 대사를 감당해야 한다. 젊은 배우들도 소화하기 쉽지 않은 양이다. 일을 마친 피곤한 가장 '윌리'가 집에 도착하는 첫 장면이다. 조명이 켜졌다.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 터졌다. 양 손에 무거운 가방을 잔뜩 든, 구부정한 어깨의 우리 시대의 아버지가 저기 걸어오고 있었다.

이순재에게서 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주 봐왔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의 '대발이 아빠'는 대가족을 이끄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 아버지의 전형이었다. 여러 편의 사극과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왕이나 근엄한 스승 역시 '아버지' 역할의 연장선상이었다. 시대가 흘러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에서 연기한 한의사 '이순재'는 여전히 대가족을 이끌고 있지만, 가족 권력의 중심에서는 한 발 물러났다. 대신 더 엉뚱하고, 친근한 아버지이자 할아버지가 됐다. 그리고 연기인생 60주년을 맞은 올해, 그는 기념작품으로 다시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골랐다. 평생을 바쳐 일을 했지만 결국 사회에서 내쳐지게 된 소시민 아버지 '윌리'로 무대에 오른다. 이미 여러 차례 이 작품을 공연했지만 "이번이 마지막 '세일즈맨'이 될 것"이라고 했다.

"1978년에 '세일즈맨'을 할 때는 이 연극이 제시하는 상징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서 밀러가 이걸 썼을 때가 1949년이다. 작품의 배경이 된 뉴욕에선 자본주의가 피어나 도시화와 개발이 한창 진행됐다. 개발에 의해 한 세대가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리그리면서 경고의 메시지를 담았다. 근데 이 작품을 우리가 처음 공연했을 때가 70년대다. 당시 우리나라는 개발 우선주의였기 때문에 당연히 공감이 안됐지. 그만큼 시대를 앞서간, 상징성이 강한 작품인 거다. 이번 기회에 원작도 다시 봤다. 잘못된 표현도 구서구석 고쳤다. 최대한 원작에 충실하다보니 공연 시간도 두 시간 사십분이나 됐다."

이순재는 "이번이 마지막 '세일즈맨'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순재는 "이번이 마지막 '세일즈맨'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연극 무대에 오르면서 첫 출연료를 받은 작품도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1956년 대학 3학년 시절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를 했으니 거의 20여년 동안 수입도 없이 무대에 오른 셈이다. 졸업 후에는 극단 실험극장의 창단멤버로 소극장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는 '동인제'라는 시스템을 통해서 극단 단원들이 제작과 출연, 운영까지 공동으로 도맡았다. "밑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에 출연료를 받을 마음도 처음부터 없었다"고 했다. "다들 힘들게 살았다. 점심때가 되면 시원하게 '밥 먹으러 가자'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각자 알아서 눈치껏 해결해야지." 그나마 1964년 TBC가 개국하면서는 드라마 출연으로 생계를 해결했다. "내가 TV에 잠깐 출연한 거를 보고 기겁하던 사람도 있었다. 배우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생활도 무절제한 거 아니냐고 하더라. 이게 '딴따라'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서울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엘리트가 '딴따라'를 한다고 했으니 집안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매일 같이 영화를 끼고 살던 '영화광'이 배우의 길을 걷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일한 취미가 영화보기였다. 그 땐 정말 좋은 영화들이 많았다"며 고전 영화며 외국감독과 배우들의 이름을 말할 때 그의 눈빛이 살아났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감독으로 비토리오 데 시카(1901~1974), 로베르토 로셀리니(1906~1977), 루치노 비스콘티(1906~1976)부터 시작해서 프랑스 누벨바그 시대의 장 뤽 고다르(85), 영국에는 로렌스 올리비에(1907~1989)의 셰익스피어 영화들까지 전부 예술영화다. 명작, 명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우와, 저건 정말 예술의 경지구나' 확신했다. 남들은 우리 직업을 '딴따라'라고 하는데, 나는 그때 이미 그 안에서 예술성, 창조의 힘을 발견했던 거라고."
반세기 전 고전배우들을 보며 인물 탐구를 했던 그는 이제 살아있는 연기의 교과서가 됐다. 연극, 영화,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출연한 작품만 300여편. 스스로가 "이만하면 잘했다"고 인정하는 작품은 몇 안된다. 지금 당장 회고전을 한다면 어떤 작품을 고르겠냐는 질문에 답한다. "TBC에서 했던 '내 멋에 산다(1966)'와 '님은 먼곳에(1969)', 언론통폐합 이후에는 '풍운(1982)', '사랑이 뭐길래(1991)', '허준(1999)' 등이 생각난다. 연극 중에는 대사가 육백 마디나 됐던 '시라노(1971)'나 '베케트(1966)'가 평가가 좋았는데 상은 못받았다. 영화는 '막차로 온 손님들(1967)', 대종상 후보에 올랐던 '집념(1976)'이 있는데 역시 상을 못받았다(웃음)."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에 대해서도 "웃기면서도 콧날이 시큰시큰하게 하는 페이소스가 있었던 작품"이라고 애정을 보였다.

지금도 연습실에 제일 먼저 도착한다는 그는 후배들에게도 "끊임없이 공부할 것"을 주문했다. "'내가 이걸로 떴으니까, 다음에도 이걸 하겠다' 이러면 배우로서 끝난 거다. 연기에는 수많은 표현의 수많은 다양성이 있다. 내가 한 연기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배우에게 가장 위험한 조건이 자만이다. 늘 새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문화계 큰 어른으로서 최근의 사태에 대해서도 "문화라는 명칭으로 벌어진 '비극적 현상"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 때문에 문화 분야가 다시 침체될까 걱정된다. 벌써부터 사람들이 '문화'라는 개념 자체에 혐오를 느끼기 시작했다. 자연히 정부 지원도 정체될 수밖에 없고 기업 후원도 줄 거다. 우리로서는 정말 뒷받침이 필요한 데 말이다. 하지만 어느 분야든 문화가치가 부가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깨끗하고 진정성있는 문화정책이 이뤄져야 한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오는 13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연극을 하겠다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처절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며 "문화융성이 문화 말살이 돼 버렸지만 우리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헤쳐 나가자"고 다독였다. 지난 29일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진행된 인터뷰가 끝나고 나눈 악수에서 노장 베테랑의 온기와 에너지가 그대로 전해졌다.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사진=백소아 기자 sharp204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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