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이 되어,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가.’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이들처럼 그를 불러냈던 것은 분노였다. 열망이었다. 그리고, 회한이었다. 92년 장맛비가 내리는 서울 거리’의 노래 가사가 그를 먹먹하게 했던 것은 분노와 열망에 앞서는 회한과 자책이었다. 지금의 이 참담한 현실 앞에 얼굴을 들기 어려운 부끄러움, 자신을 향한 질타였다. 그의 대학 동문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한다며 이름을 올려달라고 해 왔을 때 그의 마음 한 자락이 불편했던 것도 그 자책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차라리, 동기 한 명이 작성해 ‘작은 선언문’이라고 이름 붙여 내놓은, 그러나 선언문이라기보다는 ‘반성문’이라고 해야 할 글이 그의 심경을 말해주고 있었다.
C씨가 촛불을 들고 소리를 높일 때 그건 자신을 향한 규탄과 질타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젊은이들의 선배로서, 아이들의 어른으로서 면목이 없는 자신에 대한 질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만한 청와대 수석, 그리고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장관이 자신의 84학번 대학 동기라는데, 그와 같은 ‘친구’들이 괴물이 돼 가는 동안 나나 우리는 대체 무얼 했던가, 하는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집회가 끝난 뒤 C씨는 광화문 광장을 나오는 길에 ‘박근혜 퇴진 이후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이라는 제목의 벽면 앞에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는 시민들이 쓴 포스트잇들이 붙어 있었다. “공정하고 공평한 대한민국” “우리 아이들의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 사회” “열심히만 한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C씨는 자신의 안에서 뭔가 잊고 있었던 게 조금 되살아 오르는 걸 느낀다. 나이를 먹는 것은 곧 무력해지고 비겁해지는 것이지, 라는 마음이 퇴적층처럼 쌓여 있는 내면의 밑바닥으로부터 뭔가가 올라오는 듯했다.
그것을 이를 테면 ‘소년’이라고, ‘청년’이라고 해 두자. 그리고 '어제의 청년’이 ‘오늘의 청년’과 만나는 걸 그려보자. 그럴 때 정태춘 시인의 노래처럼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은 ‘다시 일어서지’ 않을까. 또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지' 않을까.
이명재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