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미술관에서 내년 3월26일까지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1987년 이제 막 슈퍼모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17살의 나오미 캠벨이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가 평소 존경하던 크리스찬 디올을 생각하며 만든 강렬한 붉은 색 코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텅스텐 조명 아래 나오미 캠벨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고, 사진작가 닉 나이트는 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역동하는 피사체를 향해 셔터를 눌러대는 순간, 옷의 디테일은 사라지고 새하얀 배경 가득 붉고 검은 실루엣만 남았다. 작가는 "여성의 몸을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요지 야마모토의 말이 닉 나이트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모델을 중시하던 당시 패션계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화보가 탄생했다. 닉 나이트(Nick Knight·58)는 이때를 "내가 본 패션 퍼포먼스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회상했고, 실제로 이 사진으로 그는 패션계에서 유명세를 치르게 됐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 누구도 다른 이들이 만든 잣대에 자신의 삶을 맞춰 살아서는 안된다", "나는 단지 세상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뿐이다" 등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하다.
지난 6일 대림미술관에서 개막한 '닉 나이트 사진전'의 부제는 '거침없이, 아름답게'이다. 국내에서 그의 작품과 작업과정이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영상·설치 등 110여점이 6개 섹션으로 나누어져 있다. "나는 아름다움을 정의 내리지 않는다. 다만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정형화된 '아름다움'의 개념을 뒤집는 일에 무척 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그의 말대로 각각의 작품은 '아름다움'의 외연을 넓히는 데 거침없다. 1980년대 남성성의 상징이었던 담배를 입에 물고 구부정하게 앉아있는 여자 모델의 사진이나, 신체장애가 있는 이들을 클로즈업해서 찍은 사진들이 대표적이다. 패션 화보에서 금기시됐던 폭력, 전쟁, 차별, 죽음 등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도 있다.
닉 나이트는 1958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1970년대 말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의대로 진학했으나 다시 적성을 찾아 본머스앤풀 예술대학(Bournemouth & Poole College of Art and Design)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이 시절 닉 나이트는 자신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지닌 동시대 젊은이들 '스킨헤드(Skinheads)'족의 패션과 일상에 매료돼 작품으로 남겼다. 이 프로젝트는 후에 닉 나이트가 전문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계기가 됐다. 작가의 '스킨헤드' 작품들은 1982년 사진집으로 출간된 이후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됐다.
영국 패션 매거진 '아이디(i-D)'와 함께 진행한 초상사진 섹션에서는 반가운 얼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카메라를 응시하며 춤을 추는 듯한 팝스타 레이디 가가, 임신 중인 모델 에린 오코너, 세계적인 모자 디자이너 스티븐 존스 등이 그 주인공이다. '페인팅 & 폴리틱스' 섹션에서는 사진과 회화, 디지털 그래픽 기술을 결합한 닉 나이트 고유의 초현실주의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존 갈리아노의 드레스에 핑크색 파우더를 흩날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사진, 알렉산더 맥퀸의 의상을 입은 모델 데본 아오키를 미래지향적 사이보그 전사로 그려낸 사진 등에서 그의 과감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최근에는 모델 케이트 모스의 사진을 3D 프린터로 출력해 조각상으로 만든 작품까지 선보이는 등 닉 나이트는 여전히 실험적 작업의 최전선에 서있다. 그는 셔터를 누르는 한 순간만을 포착해내는 사진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한다. 온라인 플랫폼 '쇼 스튜디오(Show Studio)'를 통해 자신의 패션필름을 실시간으로 대중들에게 선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닉 나이트는 "휴대폰 등 여러 기술이 가능한 사회에서는 가능한 모든 소통방식을 동원해 이미지를 발현해야 한다. 이제 사진은 과거를 응시하는 게 아니라 더 열어야 한다. 단편적인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인 단계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전시는 내년 3월26일까지.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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