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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그 후]'애물단지'된 추석이 한국인에게 보내는 호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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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안녕하세요, 한국인 여러분. 저는 추석입니다. 한국인들은 특히 '한가위'라는 순 한글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저를 좋아해주셨습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말은 참 듣기 좋습니다.

정겹고 흥이 많은 한민족은 예로부터 일년 중 달빛이 가장 좋은 음력 8월15일마다 모여 월광과 각종 민속놀이를 즐기며 축제를 벌여왔습니다. 전쟁으로 이산가족들이 수없이 생겨나고, 산업화 이후 도시화ㆍ이농 현상이 심해지면서 가족ㆍ친척들의 연례 단합대회 형식이 되었습니다. 떠났던 고향에 돌아와 조상의 묘를 돌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또 그 시절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친척 동년배들과 어울려 놀 생각에 며칠 전부터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엔 쌀밥과 고기 등 만난 음식을 즐기면서 영양 보충을 할 수 있는 기회였죠.
그런데 요즘 한국 여기저기서 저를 욕하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특히 저 뿐만이 아니라 설날과 같은 제 친구들까지 몽땅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요새 유행하는 SNS라는 곳에 들어갔다가 "시댁이나 친정을 가는 게 문제가 아니다. 명절 자체가 싫다"는 말을 듣고선 큰 정신적 충격까지 오더군요.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요? 한 여론조사를 보니 사람들은 저를 싫어하는 이유로 '유리지갑'과 높은 물가(47.5%)을 1위로 꼽았습니다. 즉 경기가 어려워 먹고 살기 힘든 데 웬 명절이냐는 거죠. 두번째로 '교통체증'(45.3%)이 꼽혔고, ▲ 암울한 나의 상황(39.5%) ▲친척들의 막말, 잔소리(38.6%)'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집안일과 손님들( 22.4%)' 등도 꼽혔습니다.

명절 음식의 과도한 칼로리로 살찌게 됐다며 저를 욕하는 분도 많고, 며칠 쉬니 생체리듬이 흐트러졌다고 투덜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특히 제가 부부싸움ㆍ이혼을 증가시켰다는 신문기사도 수두룩하더군요
이쯤 되니 이젠 고인이 되신 전직 대통령님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막가자는 거지요?'

아니. 왜 온갖 인간 사회 문제의 책임을 저한테로 돌린단 말입니까? 경제가 어렵고 지갑에 돈이 없는 게 제 탓인가요? 교통체증은 인간들이 자초한 것죠. 본인의 상황이 어려운 것도 제 탓은 아니고, 친척들의 막말ㆍ잔소리는 그 자신들의 무교양ㆍ무례함 탓일 뿐 저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집안일과 손님이 많아서 힘들다구요? 인간 사이의 권력 관계나 노동 배분에 제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받은 것은 인정합니다만 온전히 제 탓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가장 억울한 것은 제가 부부싸움ㆍ이혼을 부추겼다는 주장들입니다. 물론 명절 이후 이혼율이 높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건 그 부부의 관계가 명절이라는 계기를 통해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을 뿐 아닌가요? 가사 분담이나 말다툼으로 헤어지는 부부들은 이미 평상시에도 관계가 안 좋았을 겁니다. 그러니 서로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다가 싸우고 이혼을 선택하는 것이겠죠?

투덜대는 청년 취업준비생들 여러분, 처지는 이해합니다만 취업난이 제 탓은 아닙니다. 정부의 허술한 대책이나 불경기를 탓하셔야죠. 치열한 입시 경쟁이나 만혼ㆍ혼인 기피 풍조, 저출산도 저와 특별한 연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뭐, 솔직히 얘기하자면 제 잘못도 있습니다. 우선 저는 농사를 짓던 고대 씨족 사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첨단 정보 통신 산업과 교통수단이 발달한 현재와는 맞지 않습니다. 가족끼리 언제 어느 때라도 만날 수 있고, 식량이 풍부해 굳이 특별히 날을 잡아 만나서 만찬을 즐길 이유가 없다는 거 인정합니다.

한국은 특히 전쟁과 산업화ㆍ도시화로 인한 극심한 인구 이동(도시→농촌) 현상이 겹치면서 유독 명절 쇠기에 극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오히려 핵가족화ㆍ1인 가구화 등 가족 제도의 변동으로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여전히 제 역할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아무리 가족 파괴 사회라지만, 인간이 영화 메트릭스처럼 인공 생식으로 양육되지 않는 한 가족 제도는 영원할 수 밖에 없고, 그 와중에 저 또한 나름대로 필요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말 대로, '달빛 좋은 가을 저녁 가족끼리 모여 노는 날'이 어느 시대인들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예전의 관습을 불필요하게 지키면서 괜히 갈등을 일으키고선 저한테 책임을 돌리는 이들과 달리 벌써부터 저의 본뜻을 되살리는 한국인들도 많습니다. 서로에게 부담 주지 않고 추수의 기쁨을 나누며 가족ㆍ친지들과 정을 나누고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번 설거지는 시아버지가 다 해주마"라는 현수막을 걸어 놓은 어느 동네 이장님들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말 그대로 차 한 잔과 과일 만으로 간소한 차례상을 차리고, 친척ㆍ형제ㆍ자매들에게 예의를 지키면서도 따뜻한 격려와 정이 담긴 대화를 나누는, 그런 명절이 바로 저의 본모습입니다. 거리가 멀다면 중간에 모이면 됩니다. 운전 피로는 미래의 자율운전차량이 해결해 줄 수도 있고요.

'장남'만 제사를 지내는 게 싫다면 다같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 나눠서 지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제주도 같은 곳에선 이미 그렇게 하고 있더군요. 벌초와 음식 준비·설거지는 남녀 노소 불문 다 같이 나눠서 하고 남는 시간엔 가족 전체가 모여 나들이를 가거나 전통놀이를 즐기고, 더 나아가 사회복지시설에 봉사를 가는 모습들도 한번 그려봅니다.

이상, 욕을 잔뜩 먹어 배가 보름달 만해진 2016년 '추석'이었습니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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