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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 <계간 파란> 창간호

최종수정 2016.03.18 17:43 기사입력 2016.03.1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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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파란 창간호

계간 파란 창간호

[아시아경제] <계간 파란> 1호가 ㈜파란에서 나왔다. 언제 나오는지, 어떤 모양일지 나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잡지다. ㈜파란은 이 계간잡지를 내기 전에 <무크 파란> 창간호를 냄으로써 몸 풀기를 마쳤고, <무크 파란>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계간 파란>에 대해서도 어떤 식으로든 기대를 품었다.

<무크 파란>은 다 합쳐 596쪽인데 시인 아흔여섯 명이 쓴 시와 에세이만 실었다. 소설이나 평론 따위는 없다. 시인 한 명이 여섯 쪽에 글을 실었다. 시인에 대한 간략한 소개 한 쪽, 시 두 편, 에세이 한 편이다. 무크가 나왔을 때 서평에서 썼듯이, 나는 이 책에서 타오르는 야망과 권력 의지를 발견했다. 아주 노골적인.

㈜파란의 대장인 채상우에게 ‘시인들을 끌어 모은 과정과 기준’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획위원 열한 명이 ‘현재의 한국 시단을 대표할 수 있을 시인’들을 가려 뽑되 1990년 이후에 등단한 시인들로 제한하였다. 지난 25년 동안 등단한 시인들을 대상으로 향후 25년을 내다보자는 취지에서였다.”

나는 이 말을 “나(또는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말로 뭉뚱그려 들었다. 보라, 기획위원 열한 명이라고 하지 않는가. 벌써 패를 짰다. 조직은 권력의 다른 이름이다. 시인을 가려 글을 맡기고 그걸 모아서 편집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문학잡지가 권력의 표상으로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독자를 위해 책을 찍어낸다는 말은 대개 거짓말이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경쟁 분야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긴장을 만들어낸다. 나는 사실 ㈜파란이 중뿔난 무엇인가를 생산해낼 것으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늘 아래 새로움이란 참으로 찾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재가 필요하다. 나는 후원금이나 집어넣고 이들의 무크와 잡지와 시집을 기다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상우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고, 그의 젊은 토로는 나에게 인내와 기대를 함께 요구했다.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바로 시를 쓰고, 시로써 스스로를 개진하고, 이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꿈꾸고, 시를 읽고 밤을 새워 토론하는 것이다.”

채상우에게 <계간 파란>을 소개하는 보도 자료를 요청했더니 파일이 한 무더기 왔다. 문서파일과 사진 파일. 잡지를 광고하는 포스터와 잘생긴 남성 다섯 명이 보였다. 그중 둘은 카메라를 바라보고 사진을 찍었다. 셋은 렌즈를 외면했는데, 그나마 둘은 웃고 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사람을 의심하는 습관이 있어서 딴 데 쳐다보고 찍은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문서는 이런 글로 시작된다.

"<계간 파란>은 매호 ‘이슈(issue)’와 ‘신작시’ 두 가지 코너로만 짜인 단행본에 준하는 체제로 간행된다. 이처럼 계간지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다양한 코너들을 과감히 떨쳐 버리고 단일 이슈와 신작시로만 지면을 기획한 까닭은, 지금-여기 한국시의 근본적인 화두이자 가장 긴급한 문제일 수 있을 그 어떤 이슈를 설정하고 탐구함으로써 그것의 구도와 흐름과 비전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킬 ‘파란’을 창출하고자 해서이다."

이들은 ‘기존의 문예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내세웠다고 강조했다. 키워드는 ‘이슈’와 ‘신작시’다. 그런데 나는 이것만 가지고는 대단히 새롭다는 느낌을 얻지 못했다. 내가 받은 첫인상은 “아따, 거 꽤 요란하네!” 정도다. 꽤 요란하기 때문에 새로운 매체로서 성공적인 출발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다. 나의 불만은 다소 엉뚱한 곳에 있는데, 이들이 사용하는 문장이다. 해독은 가능하지만 어딘가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문장. 이건 전략일까?

“편집진이 첫 번째 이슈로 ‘사건들’을 선택한 까닭은 한국 현대 시사를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과 새로운 문제틀에 입각하여 다시 조명하고자 뜻해서이다.” 내가 기자이기 때문에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편집진은 첫 번째 이슈로 ‘사건들’을 선택했다. 한국 현대 시사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과 새로운 문제틀에 입각하여 다시 조명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쓰면 비지성적이고 문학적 향기가 없나?

다음의 문장은 늙은이가 목구멍 속에서 지글거리는 가래를 얼른 뱉지 않고 내처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즉 <계간 파란> 1호의 편집진은 알랭 바디유(Alain Badiou)와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제안한 독법에 어깨를 나누어 지금까지 우리 앞에 제출되었던 이런저런 ‘문학사’ 혹은 ‘시사(詩史)’라는 이름표가 붙었던 출간물들의 세계관과 역사관, 시간관을 폐지하고, 더 나아가 그것들이 형성해 왔던 의미소들을 해체, 재구성하고자 ‘사건들’이라는 제하에 11분의 글을 모셨다.”

(11분? 우리말에는 다양한 헤아리기 기능이 있다. 열한 분이겠지. 11분은 ‘eleven minute’다. 흐흐.)

그리고 이런 문장은 낡아 빠진 번역 투로서 새로운 매체의 출발을 선언하는 보도 자료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미리 말하자면 이러한 작업은 앞으로 <계간 파란>을 통해 지속될 것이다. 알랭 바디유의 말처럼 진리를 형성하는 과정은 계속적이고 내재적인 단절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보도 자료나 선언은 그 뜻을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작성해야 한다. 나는 이 보도 자료를 읽고 공감하지 않았다. 아마 <아시아경제> 말고 다른 매체의 누군가가 이 암호 같은 문장을 해독해 거룩한 기사를 쓰겠지만 나는 아니다.

이렇게 이해한다. 풀밭에서 뛰놀고 개천에서 멱 감던 청년들이 어른들 모이는 잔치에 간다니 빼입은 거라고. 적어도 보도 자료를 통해 설명하는 이들의 코스튬은 뭔가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아니다. 그리고 불편한 옷을 입은 청년이 격식에 맞춰 눈인사를 나누고 숙녀의 손을 잡아주듯 부자연스럽고 능숙하지도 않다. 직설적으로 얘기하자면 젊은이가 ‘꼰대’의 말을 흉내 내(또는 배워) 사용하는 것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자의식은 그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게 만들 것이다. 편집진 내부에서도 완전한 동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보도 자료를 썼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만만치 않으며 앞으로 본때를 보일 터이니 각오해라 또는 알아 달라”는 얘기다.

보도 자료가 어쨌든 중요하지는 않다. 보도 자료를 통하여 태도를 보았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리고 정작 책으로 들어가면 지금까지 한 얘기는 다 그들의 보도 자료나 머리말처럼 큰 영양가가 없다. 책만 좋으면 된다. 다만 좋아도 보통 좋아서는 안 된다.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시작이 이미 있는 밥상에 숟가락 한 개 얹는 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독자의 식단을 바꾸겠다는 야망을 감추었기에.

‘이슈’ 부분은 그냥 그랬다. 도전적인 주제나 사고를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 실린 글을 읽어가지고는 도대체 앞서 언급한 ‘가장 긴급한 문제’가 뭔지 알아낼 재간이 없다. 물론 못 쓴 글은 한 꼭지도 없다. 읽어보면 좋을 글들이다. 글쓴이들이 사용한 언어에 대해 불만은 있지만 내가 어쩔 수 없기에 그러려니 하고 읽었다. 그리고 ‘신작시’ 부분은 나도 시를 공부했으니 공들여 읽었다. 나는 채상우가 여러 해 전에 쓴 시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단단하게 굳은 도토리묵을 한 숟갈 한 숟갈 베어 먹는다 사람도 태어날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굳고 강해진다 몰랐다 술에 취하지 않는 저녁이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선배는 일회용 면도날로 왼쪽 눈썹을 밀면서 사랑했다고 고백했다”

놀라움의 형식이나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이 시에서는 지성과 감각, 그리고 젊음의 에너지가 이글거림을 느꼈다. 채상우는 이토록 놀라운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만드는 <계간 파란>에서도 그러한 놀라움을 기대하고 있다. 채상우가 마구잡이로 시인을 골라 그들의 작품을 실을 리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아직 다 읽지 않았으며 지금은 책갈피를 306쪽과 307쪽 사이에 꽂아 두었다. 김종연이 쓴 ‘이십 대가 간다’가 두 쪽에 걸쳐 있다. 나는 시를 한 번에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두어 번 읽은 이 시는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다) 묘하게도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후배가 시를 보아 달라며 원고지에 적어온 작품을 떠올리게 했다. 후졌다는 뜻이 아니다. 낯설지 않았다. 나는 곧 이 작품을 다 읽을 것이고, 빠르게 잊을 것이다. 우리가 쓰는 시의 운명은 대개 이렇다. 한여름 저녁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공들여 지어 나가는 거미집. 짓는 동안 이미 낡아가는 그 미로의 한복판에 시인이 있다.

애틋한 기대와 성원을 담아 이 글을 <계간 파란>에 바친다. <계간 파란>은 매우 좋은 책이다. 그러나 ㈜파란을 중심으로 의기투합한 젊은이들이 창간호 정도로 만족할 리 없다고 생각한다. 남다르고자 하는 의지는 반드시 행위를 동반한다. 나는 곧 은행에 가서 회비를 내고 다음호를 기다릴 것이다. 다음호가 나오면 또 뭔가 끼적일 것이고.

▶ 사족 : 이 책을 만든 사람들에게 장삿속이라고는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안다. 회원 모집 안내를 보고 느꼈다. 회원의 종류는 두 가지로, 일반회원과 특별회원이다. 회원이 되면 어떤 혜택이 있는지 잘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회원의 자격이 얼마 동안 유지되는지, 가령 20만 원을 내고 일반회원이 되면 1년 동안 자격을 유지하는지 평생 가는지 알기 어렵다. 밑에 가입 기간을 적어 수시로 가입할 수 있고 매년 가입일을 기준으로 갱신한다고 했으니 짐작컨대 1년 단위로 다시 회비를 내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난 싼 쪽으로 선택하겠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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