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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그랜드캐년 뛰어넘은 두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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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탈주극 <델마와 루이스> 다시 보기

차를 타고 그랜드캐년 뛰어넘은 두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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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 1991년. 그때만 해도 지금과는 또다른 '지긋지긋한 남자들의 세상'이었던 걸 다시 읽는다. 영화는, 여자들의 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페미니즘을 읽어내고 터져나오듯 탈주하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길어올렸다. 작년 '마션'으로 화성 바람을 일으킨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작품이다. 외계 생명체를 다룬 '에일리언' 시리즈도 그가 남긴 역작들이다. 그런 그가, 아주 오래 전에 여성들의 탈주극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당시 여성들에겐 남성들의 세상 바깥 모두가 외계(外界)였다는 의미일까. 델마와 루이스는 정말, 이 세상의 지도에 없는 길을 자동차를 타고 달려갔다.

델마 디킨슨(지니 데이비스). 남편의 말에 복종하며 집안에 갇혀 사는 순종주부였던 그녀.
루이스 소여(수전 서랜든). 식당에서 음식 서빙하는 일을 하는 싱글녀. 나날의 쳇바퀴에 갇혀 사는 것이 답답했기에 주말 여행을 기획한다. 누군가 팔기위해 내놓은 별장을 빌려줬기에 마음을 냈다. 혼자 가기는 그러니, 델마를 부추겼을 것이다.

두 여자의 오딧세이는, 뜻밖에도 자기의 굴레를 탈출하고 세상의 질곡을 뛰어넘는 '놀라운 탈주'로 바뀐다. 물론 몇 가지 차질이 생기면서부터이다. 술집에서 만난 사내가 델마를 성폭행하려 하자, 루이스가 호신용으로 챙겨갔던 총을 꺼내와 사내의 행동을 제지한다. 재미를 보려했다는 그에게 루이스는 말한다. "잘 봐둬. 여자가 저렇게 우는 건 재미 있어서가 아냐." 이런 상황에 굴욕감을 느낀 사내가 성적인 발언을 내뱉었을 때 그녀는 쥐고 있던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이 살인은 성(性) 문제에 있어 자기 발언을 통제받아온 여성들이, 자력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구급(救急)'의 반기를 드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살인을 저지른 두 사람은 남자들의 세상으로 돌아가 자수를 하고 법적 처분을 받는 대신, 남자들의 바깥으로 탈주하여 자유를 누리는 쪽으로 운전대를 돌린다.
그러나 그녀들의 탈주는 쉽지 않았다. 우선 돈이 문제였다. 루이스가 남친에게서 어렵사리 구한 돈을, 델마가 호감을 느껴 격한 사랑을 나눈, 건달 제이디(브래드 피트)가 훔쳐가버렸다. 늘 씩씩하고 적극적이던 루이스가 좌절하자, 이번엔 델마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괜찮다"면서 씩씩하게 나선다. 알고보니 건달 제이디가 가르쳐준 '은행 강도짓 기법'을 응용해, 권총을 들고 편의점을 터는 것이었다. 주부 델마의 이런 놀라운 변신은, 절박한 생존 환경에서 뜻밖의 자아와 에너지를 발견하는 반전의 쾌감을 준다. 하지만 그녀들의 죄는 한꺼풀 더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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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다시 닥쳤다. 여성들의 범죄 행각으로 사방에 수배령이 내려진 가운데, 한 경찰관이 그녀들의 차를 정지시키고 검문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겼을까. 루이스가 검문을 받고 있는 사이, 델마가 다가와 경찰관의 머리에 총을 겨누면서, 상황이 역전된다. 두 사람은 경관을 트렁크에 넣고(트렁크 철판에 총을 쏴 숨구멍 두 개를 내주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열쇠로 잠근 뒤, 길섶에 열쇠를 버리고는 유유히 사라진다.

또 하나 큰 유조트럭을 모는 얄궂은 사내가 도로에서 몇 차례 지나치며 수작과 희롱을 일삼는다. 그녀들은 그를 유인해 공터에 차를 세워놓게 하고, 엉큼한 얼굴로 다가오는 그를 향해 훈계를 쏟아낸다. 그가 욕설을 하자, 총을 꺼내 유조트럭의 바퀴를 맞히고 마침내 그 기름통을 쏴서 트럭을 전소시킨다. 사내는 미칠 듯한 얼굴이 되어 펄쩍펄쩍 뛰지만, 두 사람은 복수극을 통쾌해하며 그곳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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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는 유난히 폭력적이고 변태적인 사내들이 자주 출몰하여, 여성들이 지닌 피해망상적인 편견이 남자의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이미지를 과도하게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 탈주하고 있는 여성들의 극적인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선 불가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곡절을 겪으며 도주극을 펼치는 동안, 경찰의 추격은 갈수록 집요하고 거대해진다. 그러나 그녀들은 광막한 대지 속에서 마음껏 숨쉬며 풍경을 만끽하는 일에, 더할 나위 없는 쾌감과 만족을 느낀다.

델마는 말한다. "너무 아름다워."
루이스는 말한다. "정말 그렇네."
델마가 중얼거린다. "이렇게 여행해볼 기회가 없었어."
루이스가 웃으며 답해준다. "지금, 하고 있잖아."

그랜드 캐년 근처의 아름다운 서부 지역을 어둠 속에 내달리고 있을 때의 대화는 더욱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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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가 묻는다. "너 깨어있니?"
루이스의 대답. 눈을 뜨고 있으니, 깨어있는 거겠지.
델마가 말한다. "나도! 깨어있는 느낌이야."
루이스의 공감. "좋네."
델마의 단언. "확실하게 깨어있어. 한번도 이렇게 깨어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모든게 달라보여. 뭔가 새로운 게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이 대목이 이 영화를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정위치시키는 의미심장한 대화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의 결말을 예감한 듯, 끝없이 법의 심판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더 나아가지 말고 이쯤에서 협상하고 싶은 충동과 그럴 수 없다는 결의를 동시에 느낀다. 루이스가 경찰관과 통화를 한 뒤, 델마는 묻는다. "너, 포기한 거 아니지? 그 사람들과 협상 안 할 거지?" 루이스가 "협상 같은 건 안한다"고 단언하자 델마는 이렇게 말한다. "난 이미 뭔가를 건너왔고, 돌아갈 수 없어. 난 그냥, 살 순 없어."

추격하는 경찰의 숫자는 자꾸 불어났다. 헬기까지 따라붙었다. 그랜드 캐년의 벼랑에서, 경찰관들은 총을 버리고 투항할 것을 권유한다. 그녀들은 망설인다. 그때 델마가 말한다. "좋아, 잘 들어. 우리 잡히지 말자. 그냥 계속 가자." 루이스가 묻는다. "무슨 말이지?" 델마가 웃으며 말한다. "가자." 루이스도 알아챈듯 빙긋이 웃는다. "진심이야?" 델마의 확언. "그래. 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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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을 이렇게 처리한 것은, 궁여지책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유를 찾아 떠난 여자들의 반란은, 결국 남자들의 투망에 나포되는 몸짓이 아니라,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빛나는 초월임을 그랜드 캐년을 날아가는 자동차 위의 두 여인을 통해 보여준 것이리라. 더구나 그 차 위에서 루이스는 이렇게 묻고 있지 않은가. "이번 휴가 어땠어?"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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