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추첨공화국…유치원 입학·군입대·아파트 입주도 '運발'로 결정
◆유치원 '로또' 경쟁, 중고교도 추첨 진학=지난 11월 경기도 일산의 한 공립 유치원. 아쉬움의 탄성 속에 간간이 환호성이 터졌다. 내년 만3세 원아모집이 추첨으로 결정된 것이다. 12명 모집에 79명이 지원해 6.6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해마다 중학교 배정을 놓고도 살벌한 풍경이 연출된다. 배정 기준에 따라 자녀의 학습 환경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눈에 불을 켤 수밖에 없다. 중학교 선택은 과거 '뺑뺑이'로 불리는 추첨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선지원 후추첨 방식 등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이뤄진다. 평준화 지역 고교들은 기본적으로 학군별 컴퓨터에 의한 무작위 추첨 방식이다. 서울의 '자율형 사립고'도 지원율이 모집 정원의 120%에 미달하는 학교는 지원자 대상 추첨으로 신입생을 선발한다.
◆'고시' '로또'가 돼버린 입대='입대 경쟁'은 웬만한 입시경쟁 못지않을 만큼 치열하다. 의무경찰(의경) 추첨 선발 사례가 대표적이다. 경찰은 이달부터 의경 선발 절차 가운데 최종 단계를 면접 방식에서 무작위 공개추첨 방식으로 바꿨다. 지원자가 워낙 많은 탓에 선발하고 나면 곳곳에서 비리를 의심하는 뒷말이 쏟아져 나오고, 면접에 대한 부담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의경 입대 추첨 경쟁률은 지역에 따라 10대 1을 넘기기도 한다.
◆아파트·취업·사업도 추첨인생=학교 추첨이나 입시의 좁은 문을 지나 어렵사리 사회에 발을 내디뎌도 '뺑뺑이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할 때도 동과 호수 결정은 '추첨'이 기본이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이달 초 거래된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같은 동의 1층 매물과 11층 매물 실거래가는 5000만원(10.63%)까지 차이가 난다. 추첨에 따라 아파트 재산의 격차가 벌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일자리도 제비뽑기 수단이 등장했다. 서울시 공원녹지사업소는 지난 2월 공원 유지보수에 필요한 기간제 근로자 300명을 채용하면서 최종 합격자는 공개추첨, 이른바 제비뽑기로 선발했다. 기업도 추첨에서 자유롭지 않다. 공항면세점의 경우 한국자산관리공사의 전자자산처분시스템을 통해 입찰절차가 진행된다. 최고가를 써낸 사업자가 2곳 이상이면 무작위 추첨으로 승패가 갈린다.
◆추첨의 명과 암, 능력은 뒷전=추첨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공정성 시비라도 해소하겠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추첨 전후로 '꼼수'가 더해지면 '제비뽑기'의 셈법은 더 교묘해진다. 검찰이 기소한 도로공사 입찰 비리를 보면, 비슷한 수준의 입찰가를 미리 정해놓은 뒤 '사다리타기'식으로 업체들이 낙찰을 받아낸 것으로 조사됐다.
추첨이 삶의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는 것은 '공정함'이라는 가치의 중요성 때문이다. 특혜 시비를 없애려는 고육책인데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공평·공정을 기한다는 측면에서도 추첨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능력이나 경쟁력이 뒷받침돼야 할 경우까지 추첨으로 가려진다면 무분별하게 기회를 배분하게 되는 부작용도 있다"고 말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김효진 기자 hjn2529@asiae.co.kr
정준영 기자 foxfur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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