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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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허진석] 1786년 9월 26일 저녁,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파도바에 도착한다. 그는 전망대에 올라 주변을 살핀다. 남동쪽으로 트인 평원과 푸른 지평선 저 너머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탑을 바라보며 그의 가슴은 셀렌다. 그는 이틀 뒤 베네치아에 도착한다. 이렇게 썼다.


“운명의 책 속 나의 페이지에는 내가 1786년 9월 28일 저녁, 독일 시간으로는 5시에 브렌타에서 배를 타고 석호로 들어오면서 경이로운 섬의 도시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쓰였다.” 베네치아에서 괴테는 낯선 곳을 홀로 걸으며 ‘군중 속의 고독’을 체감한다.

베네치아는 괴테에게 로마 다음으로 감명을 준 도시 같다. 곤돌라를 타고 운하 사이를 오가면서 그는 바다 위에 도시를 건설한 인간에 대한 외경을 느낀다. “이는 인간의 힘을 결집시켜 만들어낸 위대하고 존경할 만한 작품이고, 지배자가 아닌 민중의 훌륭한 기념물이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1788년에 끝난다. 여행 중에 독일에 있는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일기를 묶어 <이탈리아 기행(Die Italienische Reise)>을 펴냈다. 그가 여행길에 나설 때는 서른 일곱 살, 지성과 예술적 감성이 모두 난숙했을 시기다. 책은 내용이 풍부하고 아름답다.

나는 <이탈리아 기행>을 공들여 읽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가 여행한 이탈리아가 괴테의 설명과 함께 의식의 스크린에 또렷이 상을 맺는다. 다시 이탈리아에 가면 브래드 쇼의 가이드북을 든 마이클 포틸로처럼 괴테의 기행문을 벗 삼아 포석(鋪石) 위를 걸을 것이다.


회사의 지원을 받아 쾰른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 동료·선후배들이 가끔 찾아왔다. 그들을 대성당에 데려갔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성당의 역사와 소장 유물, 예술작품에 대해 달달 외웠다. 전문 해설사처럼 설명할 수 있었다. 두 시간을 거뜬히 때웠다.


그런데 지금, 쾰른에서 누가 나를 찾아오면 어디로 데려가 뭘 보여줄지 막막하다. 서울에 문화재가 적지 않은데, 내 도시에 대해 변변히 아는 것이 없다. 무지는 성찰을 불가능하게 하고, 아름다움에 불감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 나를 세운다.


최순우 선생, 학고재 제공

최순우 선생, 학고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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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순우 선생이 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독일에서 돌아온 뒤에 읽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흥미를 느껴 같은 분야의 책을 찾다 발견했다. 1994년 6월에 초판을 찍은 학고재의 베스트셀러로 20년간 50만부, 50쇄를 발행했다고 한다.


한국미의 본질을 설명한 안내서다. 우리 문화유산들을 장르별로 묶어 회화, 도자, 조각, 건축 등 여러 영역의 작품을 따뜻한 눈길로 어루만지고 있다. 최순우 선생은 유연하고 맵시 있는 문장으로 독자를 설득한다.


그는 달항아리를 '너무나 욕심이 없고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하다'거나 '잘생긴 며느리 같다'고 표현한다. 그의 글을 통해 예술과 전통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시작하는 필치는 숨 막히게 아름답다.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비슷한 소재를 다룬 어떤 책도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에 올려놓았다. 예술 작품과 문화유산에 대한 최 선생의 애정은 우리 조상들이 살아낸 정겨운 삶에 대한 긍정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미에 대해 "우리민족의 성정이나 생활이 녹아 있어 그들이 표현한 미술품에 나타난 아름다움도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익살, 은근, 고요, 순리, 백색, 담조(淡調), 추상 등 독자적인 미의 특질을 지녀 세계적인 미술품으로 당당히 자리 잡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처음 읽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는 2002년에 찍은 보급판이다. 학고재는 지난 10월 말에 판형을 줄이고 양장본으로 바꾸어 다시 냈다. 내용은 그대로다. 학고재는 “고전을 세월의 훼손 없이 오래도록 간직하기를 바란다”고 양장본으로 낸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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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들고 우리 강토 곳곳에 흩어진 문화 유산들과 박물관에 잠든 문화재들을 만나러 다니면 좋겠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깊은 숨을 내쉬는 우리의 멋과 정이니, 낯을 맞대고 보면 얼마나 갸륵하고 절절하겠는가.


<최순우 지음/학고재/1만2천원>


허진석 huhba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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