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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결과의 평등' 이전에 '기회의 평등'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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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호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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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속에서 전국수석의 아들을 키워온 장한 어머니의 손은 거칠고 손마디마다 굳은살이 박혔다. 85학년도 대입학력고사 남자수석 송현주(19)군의 어머니 김정희(54ㆍ제주KAL호텔객실청소부)씨. 김씨 가족은 제주시 밀감과수원 관리인숙소를 빌어 살고 있다. 김씨의 소득은 월급 11만7000원과 봉사료를 포함해 20만원도 채 못 된다.'(1985년 1월5일자 경향신문 11면 발췌)

학력고사를 본 세대라면 연말연시에 발표되는 '수석'에 대한 추억이 있다.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 났다'는 신화가 현실화된 스토리다. 부모님들은 "저 아이는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수석을 했는데 너는 어째 그 모양이냐"며 자식 타박을 하곤 했다. 하지만 매년 한 번씩 나오는 학력고사 수석 신화는 집안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신분상승의 꿈을 안겨줬다. 참고서 살 돈이 없어 교과서만 가지고 열심히 했고 앉은뱅이책상에서 공부하다 엉덩이에 종기가 생겨 고생을 했다는 새롭지 않은 이야기들이지만 '나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소득불공평 문제가 뜨거운 감자다. 진작 물밑에서 부글부글 끓어 왔던 이슈였다. 프랑스 파리경제대학 교수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론'이라는 책 한 권은 방아쇠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 책의 요지는 부의 세습이 심화되는 구조 속에서 상속세 등을 크게 높여 소득불공평을 완화시키자는 것이다. 피케티 논리에 전 세계 소득 하위층은 '분노' 어린 공감을 보냈다. 어차피 따라잡지 못할 부의 불균형이 진행돼온 것을 차치하고 소득 하위층의 대다수가 '기회의 불공정'이라는 데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파이낸셜타임스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책'인 '플루토크라트'에 따르면 경제학자 이매뉴얼 사에즈의 연구결과, 2009~10년 경제회복기에 미국은 2.3% 성장했다. 그런데 소득 하위층 99% 미국인들에게 이 기간 경제성장은 0.2%에 그쳤다. 반면 상위 1%에게는 이보다 훨씬 높은 11.6%의 성장을 안겨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돈을 버는 일'을 탓할 수 없다.

상위 소득구간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는 좋은 직장을 가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명문대학을 나와야 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 여기서부터 일이 꼬인다.
퀸즐랜드 대학 경제학자 존 퀴긴 교수의 최근 연구를 보면 미국 전체 대학 신입생 규모의 1%밖에 아이비리그 대학(2만7000명)에 들어가지 못한다. 퀴긴은 이들의 졸업 후 소득을 추적조사해보니 교육 주도적인 승자 독식 경제에서 18살의 1%가 성인이 돼서도 소득 상위 1%에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부모 재력에 관계없이 본인 노력만으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균등한 기회가 부여돼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득불공평'이라는 수용 가능한 자본주의 논리가 '기회의 불균형'이라는 분노로 이어진다.

초등학교 때부터 특목고 진학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사교육을 시키고, 자기소개서를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해 악기와 스포츠, 외국어 등 온갖 스펙을 쌓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교과서로 열심히 공부해서는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견고한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놓은 셈이다. 특정 고등학교 출신 서울대 입학자들은 동문회 열기가 힘들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사람 수가 너무 많아 장소잡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라는데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부모의 지원을 받아 사립고등학교를 다니고 열심히 스펙을 쌓은 학생들이 아이비리그 대학에 들어가는 게 당연시됐다. 하지만 포브스에 따르면 그나마 미국에서는 1조원 이상 갑부 1646명 중 자수성가형이 66%에 달하고 순수상속형은 13%에 그쳤다. 한국의 경우 50대 부호 중 자수성가형은 겨우 30%로 기회불균형의 문제가 미국보다 더 심각해 보인다. 지금이라도 교육분야부터 기회불균형의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부자 돈 뺏고 기존 재원을 풀어 소득불공평을 해결하는 건 '언 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하다.





박성호 금융부장 vicman120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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