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고사를 본 세대라면 연말연시에 발표되는 '수석'에 대한 추억이 있다.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 났다'는 신화가 현실화된 스토리다. 부모님들은 "저 아이는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수석을 했는데 너는 어째 그 모양이냐"며 자식 타박을 하곤 했다. 하지만 매년 한 번씩 나오는 학력고사 수석 신화는 집안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신분상승의 꿈을 안겨줬다. 참고서 살 돈이 없어 교과서만 가지고 열심히 했고 앉은뱅이책상에서 공부하다 엉덩이에 종기가 생겨 고생을 했다는 새롭지 않은 이야기들이지만 '나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파이낸셜타임스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책'인 '플루토크라트'에 따르면 경제학자 이매뉴얼 사에즈의 연구결과, 2009~10년 경제회복기에 미국은 2.3% 성장했다. 그런데 소득 하위층 99% 미국인들에게 이 기간 경제성장은 0.2%에 그쳤다. 반면 상위 1%에게는 이보다 훨씬 높은 11.6%의 성장을 안겨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돈을 버는 일'을 탓할 수 없다.
상위 소득구간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는 좋은 직장을 가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명문대학을 나와야 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 여기서부터 일이 꼬인다.
그렇다면 부모 재력에 관계없이 본인 노력만으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균등한 기회가 부여돼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득불공평'이라는 수용 가능한 자본주의 논리가 '기회의 불균형'이라는 분노로 이어진다.
초등학교 때부터 특목고 진학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사교육을 시키고, 자기소개서를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해 악기와 스포츠, 외국어 등 온갖 스펙을 쌓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교과서로 열심히 공부해서는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견고한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놓은 셈이다. 특정 고등학교 출신 서울대 입학자들은 동문회 열기가 힘들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사람 수가 너무 많아 장소잡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라는데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부모의 지원을 받아 사립고등학교를 다니고 열심히 스펙을 쌓은 학생들이 아이비리그 대학에 들어가는 게 당연시됐다. 하지만 포브스에 따르면 그나마 미국에서는 1조원 이상 갑부 1646명 중 자수성가형이 66%에 달하고 순수상속형은 13%에 그쳤다. 한국의 경우 50대 부호 중 자수성가형은 겨우 30%로 기회불균형의 문제가 미국보다 더 심각해 보인다. 지금이라도 교육분야부터 기회불균형의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부자 돈 뺏고 기존 재원을 풀어 소득불공평을 해결하는 건 '언 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하다.
박성호 금융부장 vicman1203@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