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란 이황은 아내를 향해 달려간다. 아내의 걸음이 빨라지더니, 아이를 안은 채 저 먼 곳에 있는 소(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휘늘어진 매화나무 가지 아래로 두 사람이 눈 녹듯 사라져버린다. 황은 아내를 다급하게 불렀다. "부인, 부인!" 목소리는 잠기고 발은 떨어지지 않는다. 부인, 부인! 매화나무 가지 한 자락에 걸린 권씨의 나비방울술 노리개를 쥔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오래 전 아내가 완물 삼아 지니라고 건네준 노리개를 꽉 쥐고 있었다. 목 뒤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모처럼 사랑스런 아내와 처음 본 아기를 만났는데…. 그는 꿈으로 다시 돌아가, 연못 속의 두 사람을 건져 내오고 싶었다. 노리개를 만지며 가만히 이름을 불렀다. 설(雪)아. 이승에 태어나진 못했지만 그곳에서 잘 살아라. 내 마음에 핀 어린 매화야. 설아. 그리운 생각에 나비방울을 꼭 쥐니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그때 밖에서 "사또 나으리. 오늘 출타가 있는 날이라 준비하라고 일렀사옵니다"는 이방의 말이 들려온다. 오늘은 아전들을 데리고 보(洑)를 만들 현장을 답사하기로 한 날이다. 퇴계가 대답했다. "그래. 알고 있도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떠나자꾸나."
"저어, 사또. 날씨가 차온데…."
"그래. 아직도 좀 춥구나. 그러나 견딜 만하다."
"혹시 관아에 있는 돼지가죽 귀마개(耳掩)를 대령할지요."
"그래. 그게 좋겠구나."
어린 통인이 급히 가서 귀마개를 가져온다.
"말보다 가마를 이용하심이 어떨지요."
이방이 지난번에 했던 말을 또 한다.
"아니다. 갈 길이 머니 말이 좋을 듯하구나."
관아 밖으로 나가자마자 찬바람이 들이쳤지만, 향리들은 말 없이 뒤를 따랐다.
충주로 향한 큰 길을 통해 한성 방향으로 나아가다 목교(木橋)를 건널 때 퇴계가 호장에게 물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 개울을 뭐라고 부르는가?" "예, 사또. 저희들은 낀내(介川)라고 부릅니다." "낀내라? 어찌 하여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가?"
"아마도 이 개울이 장차 저 아래에서 남한강으로 끼어드는 내라서 그럴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것을 그냥 낀내라고 부르기엔 개천이 너무 길지 않은가?"
"과연 그러하옵니다. 이 내의 길이만 해도 거슬러 올라가보면 30리는 족히 될 것입니다."
단양군수 퇴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건넌 뒤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른다. 한참을 오르다가 문득 서서 돌아보며 그는 아전들을 잠시 멈추게 했다.
그때 공방을 맡은 아전이 말했다.
"단양은 충청도라고는 해도 워낙 특이한 곳이옵니다."
"무슨 얘기인가?"
"이곳은 강원도와 워낙 가까운 데다 주변에 큰 산과 강이 있어 추위가 극심하고 홍수도 잦은 것입니다."
"우선, 호방이 큰 죄를 저지른 건 아는가?"
"큰 죄라 하심은? 소인 영문을 모르겠사옵니다."
"충청도라 하지 않았는가?"
"?"
"단양이 충청도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 그렇게 말하였사옵니다."
"자네는 어찌 어명을 잊었는가. 충청도는 역모의 일로 청홍도로 바뀌지 않았던가. 아무리 시골이라고 해도, 관원이 나라의 영(令)도 따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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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퇴계의 예쁜 딸, 설이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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