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먼지 같은 피조물이라는 점에 인간은 역설적으로 그 존귀함이 있다. 결국 지구의 수십억년의 시간은 지금의 '나'를 위해 존재했던 시간이 아니겠는가. "만물이 모두 내 안에 갖춰져 있다"는 맹자의 선언처럼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해 수억년 동안 은행나무는 잎을 부지런히 피우고 물들고 졌다가 다시 피어났던 것이 아닌가. 은행나무 아래서 귀하디 귀한 인간의 존엄을 생각한다.
그 시험은 단 하루의 승부로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결정짓는 것이다. 그건 그 어떤 벤처보다 더 위험한 벤처이며, 어떤 정글보다 더한 험로이며, 어떤 덫보다 더 아찔한 함정이다. 내일은 그 함정을 빠져나오는 극소수의 승리자, 그리고 절대 다수의 패배자로 나누는 날이다. 많은 아이들이 날개를 펴기도 전에 꺾이는 날이며, 항해를 떠나기도 전에 좌초하게 하는 날이다.
'수학능력'은 원래 무엇인가.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능력(修學)이 됐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한 기능에 불과한 '수학(數學)' 실력 등을 측정하는 것으로 협소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협애한 측정치로 사회가 편성해 놓은 열과 오에 편성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제2의 신분'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니 이는 사회가 쳐 놓은 보이지 않는 감옥의 죄수가 되는 '수학(囚學)'이라고 해야 할 법하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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