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숙, 신구 두 배우가 부부로 출연..제6회 차범석희곡상 수상작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무대 위 허름한 단층집의 평상에는 노부부가 앉아 있다. 마당 한 구석에는 노부부만큼 세월을 먹은 홍매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들을 비추는 보름달이 하늘에 걸려 있고, 아내는 자꾸만 자신을 부르는 남편에게 와락 역정을 낸다. "내가 어디 도망갈까 봐 그라나."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홍매야, 홍매야" 아내를 불러댄다.
연극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의 한 장면이다. 간암 말기의 남편은 급속하게 진행되는 병세에 간성혼수 증상을 겪으며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를 두고 둘째아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장남만 챙기는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을 토해내는 둘째아들에게 어머니는 똑같은 레퍼토리를 읊어댄다. "너거 아버지한테는 니들이 보험이지. 니들만 생각하면 든든하고..."
연극이 끝날 때 즈음에는 객석이 울음바다가 돼 있다. 간암 말기의 아버지를 지켜보는 한 가족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무대 위에 펼쳐지는데, 특별한 무대 장치나 에피소드 없이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심금을 울린다. 아버지(남편) 역을 맡은 신구와 어머니(아내) 역을 맡은 손숙이 3년 만에 한 무대에 섰다. 배우들은 그저 내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다.
연극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 김광탁 작가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간성혼수 상태가 되셨을 때 굿을 해달라고 하시더라. 그 때 충격을 받았다. 이 작품은 거창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했다. 우리 시대 많은 아버지들이 내 아버지 같은 삶을 살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아버지들을 위해 위로의 굿 한 판 올려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죽어가는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남겨진 아내와 아들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한다. "사람 사는 거는 결국 떠나기 위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과 같다. 나도 곧 모든 것을 놓아야 할 처지에 와 있다. 작품 속 아버지는 이루지 못한 몇 가지 일들이 가시는 데 걸림돌이 됐던 것 같다. 그러니까 살아생전에 계획했던 것을 다 이루고 떠나시는 분들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은 숨 한 번 들이쉬고 내뱉는 그 차이다."(신구)
"산다는 게 다 죄다"라고 한숨 쉬는 어머니는 평생을 같이 산 아버지를 보며 "아직 할 말이 더 많은데"라고 읊조린다. "처음 대본을 읽고 너무 많이 울어서 어떻게 끌고 갈지 고민했다. 연극이 연극 같지 않고, 삶의 한 자락 같았다. 굉장히 실감났다. 작품을 하면서 남편을 보내는 아내의 심정, 이런 게 울컥울컥 올라오더라."(손숙)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는 제6회 차범석희곡상의 작품상 수상작이다. 당시 '자칫 무거워질 이야기를 물 흐르듯 담담하게 끌고 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돋보인다'는 심사평을 받았다. 김철리 연출가는 "이 시대가 자꾸 거대 담론에 휩싸여서 정작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관념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이번 작품은 두 연륜있는 배우들로 인해 살냄새를 더하게 됐다"고 말했다. 가까이, 또 멀리 있는 가족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10월6일까지. 흰물결아트센터 화이트홀.)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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