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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8장 추억과 상처 사이(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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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8장 추억과 상처 사이(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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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고 보니 그 순간, 우리 엄니가, 고향에 계신 우리 엄니가, 날 위해 정한수를 떠놓고 몇날 며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지 뭐야. 내가 밀림에서 헤매고 있던 바로 그때 말이야. 꿈에 내가 죽는 걸 보구서....”
그는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밀림 속에서 본 등불은 우리 엄니가 정한수 떠놓고 치성드릴 때 켜놓았던 촛불이었다는 거야!”

이야기는 점점 오리무중으로 흘러갔다. 그렇거나 말거나 이야기는 이야기였다. 뻥이건 구라건 따질 필요도 없었다. 자기 말대로라면 밀림에서 실종되어 십삼일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사람이 하는 말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건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는 일부러 그런 뻥과 구라를 칠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그였다. 그런 그가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을 부르며 베트남의 달빛 아래 혼자 제 흥에 겨워 흐느낀다 한들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동희형이 혼잣말처럼 조용하게 말했다.
“어떤 사건이 어떤 사람에겐 추억이 되고, 어떤 사람에겐 상처가 되지. 대체로 승자에겐 추억이 되고, 패자에겐 상처가 되는 거야.”
추억과 상처라......

하림은 동희형의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았다. 그건 아마도 동희형이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몰랐다.

“이곳을 여행하는 동안 난 베트남 친구들 얼굴에서 추억을 보았어. 특히 구찌 터널에서 만난 친구들 얼굴에서..... 상처가 아닌 추억을 말이야. 혹독한 전쟁이었지만, 그리고 그 결과 지금도 지독한 가난을 앓고 있지만, 그들의 얼굴엔 자부심과 승자의 너그러움 같은 게 느껴졌어. 하지만 정작 지금 그들보다 몇 배나 잘 먹고 잘 산다는 우리들 얼굴엔 깊게 드리워진 그늘, 상처가 있어. 저 한씨 아저씨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는 다시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다들 경제개발의 우렁찬 함성에 상처가 묻혀버리고 말았지. 고엽제 피해자는 그저 고엽제 피해자일 뿐 영예로운 평가를 받지 못해. 그게 그들 개개인의 인생에서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니. 북파 공작원들이 그 어디에서도 애국자로 존중 받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돈이나 보상보다 더 값비싼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자존심이야.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우리들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어. 남의 전쟁, 남의 이념, 남의 정의였지. 그게 상처야. 추억으로 될 수 없는 상처.”

상처를 치유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처를 햇빛 아래 드러내 말리는 것이다. 역사는 바로 보는 자만이 역사를 넘어갈 수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는 예수의 가르침이 그와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일찍이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박정희 독재 권력이 퍼뜨린 온갖 편견과 우상에 맞서 싸웠던 고(故) 리영희 선생은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려고 한 것은 국가가 아닙니다. 소위 애국,이런 것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진실, 그것입니다.”
그는 그 진실 때문에 기꺼이 옥고를 치루었고, 핍박을 받았다. 중세 시대의 온갖 종교적 위선과 편견 속에서 재판정에 선 갈릴레이는 혼자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게 진리다. 진리는 누구도 가릴 수가 없다. 그리고 진리만이 안으로 깊이 감춰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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