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7장 총소리 (121)
다음날 아침, 하림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머리는 좀 무거웠지만 몸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숱한 꿈들도 아침이 되자 꼬리를 감추듯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하림은 핼쓱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어제 내린 비 탓인지 마악 꽃눈을 틔우기 시작한 벚나무 가지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처마 밑에 걸린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이는 봄날 아침이었다.
하림은 아침밥을 챙겨 먹은 다음, 화실을 나왔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악몽이라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당을 건너 포도나무 밭 옆길을 지나갔다.
포도나무 밭 옆은 좁은 흙길이었다. 좁은 흙길을 따라 얼마쯤 나가니 저만큼 작은 언덕 아래에 올막졸막 서있는 길목 수퍼와 마을이 보였다. 그곳에 소연이 있을 것이었다. 하림은 바지에 손을 찌른 채 어깨를 구부정하게 숙이고는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그곳을 향해 터벅터벅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걸어가는 동안 하림의 귀에 멀리 바람결에 사람들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소연이 슈퍼 근처에서 울려나오고 있었다. 내용은 잘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 상당히 흥분해서 높은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도 분명히 들렸다. 슈퍼 앞 나무 탁자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앉거나 서서 웅성거리고 있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하림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갈수록 소리는 더욱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 소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니라 윤여사의 고모할머니라는 사실도 금세 드러났다. 그녀는 이만저만 흥분해있는 게 아니었다.
“어유, 끔찍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요, 엉? 무슨 일이냐니까? 동네가 망하려고 흉사가 들었어도 보통 들었어야지, 이게 무슨 끔찍한 일이냐구, 글쎄? 간이 벌벌 떨려서 살 수가 있남! 아니, 다들 뭣들 하고 있었수? 영감이 마구잽이루 총질을 해서 우리 동네 개들이 싸그리 죽어나가고 있는데도 다를 뭣들 하고 자빠져 있었는가, 하는 말이우?”
남자 노인들 서넛은 앉아서 담배만 뻐꿈뻐꿈 피우고 있었고, 그들을 주위에 대여섯명이 둘러서서 고모할머니의 악다구니 소리를 듣고 있었다.
“차암, 흉사는 흉사여. 예전엔 이런 일이 없었는디....”
담배 피우는 노인네 중의 하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림이 가까이 가자 그들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하림께를 쳐다보았다. 하림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하며 두리뭉실하게 모두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러나 윤여사 고모할머니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계속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당장 쫒아내야 돼! 암, 쫒아내야 하고말고.... 이렇게 불안해서는 한시도 살 수가 없지. 다들 말해보우. 안 그렇수?”
하림은 무심한 척 그들 뒤를 지나쳐 수퍼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때 하림의 시선에 팔짱을 끼고 서있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 얼핏 들어왔다. 여자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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